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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데빈

전에 보내주신 편지는 전부 읽어봤습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힘든 시기는 있는 법이죠, 부인.

제 그림을 보고 위로를 얻으셨다는걸 듣고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길거리에서 근근히 벌어먹고사는 화가지만 저는 제 삶에 만족하고 살고있답니다

이런 저도 과거엔 이런저런 쓴 맛을 모두 맛봤습니다

11년 전, 제가 고등학생일 무렵에 저는 지독한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소위 너드라고 불리는 그런 괴짜였습니다.

너드가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뚱뚱하고 게으르고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며, 시시때때로 혼잣말을 지껄이는 그런 부류 말입니다.

학교마다 한 두명씩은 꼭 그런애들이 있잖아요? 그게 저였습니다, 생긴것도 꼭 바보같이 생겨서 제 별명은 자판기였습니다, 지나갈때마다 애들이 제 등을 떠밀거나 다리를 걸었는데 그때마다 주머니나 가방에서 동전과 잡동사니들이 쏟아져 나왔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웃긴 별명입니다만..


가끔은 애들이 직접 제 개인사물함, 가방, 책상을 뒤져보곤 성인잡지나 만화책, 각종 잡동사니들 중에 쓸만한 걸 가지고 가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런 애들을 원망하거나 화를 낸적은 한번도 없어요, 이미 그런 상황에 길들여져서 인상을 조금만 찌푸려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훤히 다 알고있거든요.


처음엔 속으로 화를 삭혔지만 그런 상황이 반복되다보니, 이젠 정말 무슨 레벨에 도달하기라도 한건지 웃음만 나오더군요,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아이들이 제 물건을 뺏어가는 걸 눈앞에서 봐도 아무 생각도 안들었습니다.

걔네들이 지어준 별명인 "자판기" 가 어느새 내 이름을 대신했고, 나는 누군가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내가 가진 것들을 빼앗기기 위해 태어난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도 해봤지만 그냥 제 자신이 자존심도 뭣도 없는 인간쓰레기라 하루 지나면 금방 그런 생각도 잊어버렸습니다, 운동도 해보려고 했는데 게으르고 먹는 걸 좋아하는 저로썬 시도조차 해보기도 전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하는 유일한 노력은 집안에서는 최대한 밝은 척하며 폐 끼치지 않도록 하는것이었죠.

아, 제 가족은 어머니 밖에 없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어릴때 알콜중독으로 실족사 하셨고 저보다 2살 위인 형이 있었는데 어릴땐 줄곧 같이 놀았는데 몸이 약해서 형도 얼마 못가서 죽었습니다.

그 이후론 의지할 사람이 없어져서 자연스레 마음의 문이 닫히더군요.

부인. 제가 너무 칙칙한 얘기만 했나요? 미안해요, 아픔이 있는 사람은 서로의 아픔을 털어놔야만 더 솔직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드님의 일은 참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도 가족을 잃어봐서 하는 얘기에요 섀넌 부인이 막을 수 없던 일이에요,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흠 흠.. 제가 주제넘은 소리를 했던거 같네요, 죄송합니다 부인..

저희 어머니는 밤낮으로 청소일을 하셨습니다, 저녁 늦게가 되서야 퇴근하시면 꼭 제가 좋아하는 햄버거를 사오셨는데 같이 늦은 저녁에 식탁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힘든 하루를 버틸 수 있게 해줬습니다.

근데, 부인. 웃기지 않습니까?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인 저는 방구석에서 공부하는척 만화책이나 보고 킬킬거리며 할줄 아는건 아무것도 없는 불효자가 됐으니 어머니는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습니까?

늘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이미 말씀 드렸다싶이 다음날이면 그런 생각도 들지않더군요. 학교도 솔직히 가고싶지는 않은데 제가 좋아하는 미술 수업이 있는 날만 버티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지옥같은 시간이 지나고 어느 날은 집에 오니 어머니가 청소일 하시는 업체가 제가 다니는 학교랑 새로 계약을 맺었다고 어머니는 일을 하면서도 학교에서 아들을 볼 수 있다고 좋아하셨습니다.

그런 아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정작 모르시고..

그 얘기를 듣곤 멋쩍은 웃음만 지었습니다. 사실 좀 찔리더군요, 집에선 친구 많은척 바쁜척 했는데 사실 엄마는 다 알고있던게 아닐까?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학교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아시면 크게 실망하실거라고..

제가 결단심도 뭣도 없는 쓰레기는 맞지만 적어도 "자판기" 라고 불리는 제 비참한 모습을 어머니한테까지 보여주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건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으니까요

그 날밤부터 제 머릿 속은 온통 어머니에게 어떻게 해야 제 모습을 숨길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하루 이틀이 지나도 마땅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자 초조해진 저에게는 딱 한가지의 생각밖에 들지 않더군요

부인.

제가 생각한 방법은 무엇이였을까요? 힘도 없고 결단력도 없는 저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 지옥같은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거 같으세요?

읽으시면서 아셨을지도 모르겠지만 "폭력" 이였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놈들을 이길 자신은 없으니 무기가 필요했죠 저는 그 즉시 집에 있는 부엌 칼 한자루를 집어 들었습니다, 

 

이걸로 뭐 직접적으로 해를 가할생각은 없고 겁만 줘서 더 이상 자판기 노릇을 하지않는다 라는 걸 모두에게 보여줘야만 가능할거 같았거든요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부엌 칼을 두꺼운 종이로 감싸서 제방 서랍 제일 밑에 숨겨놨습니다, 다음날에 가져가려고

아침이 되고 눈을 뜨자마자 나이프가 잘있는지부터 확인했습니다, 그래요. 그자리에 잘있더군요, 혹시라도 누가 볼까봐 허겁지겁 바지 뒷쪽에 쑤셔넣고 평소처럼 학교에서 말 한마디없이 멍청한 모습 그대로 앉아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저를 항상 괴롭히는 덩치 큰 운동부인 "래리" 라는 애가 있는데 아침부터 나한테 다가와서는, 뒷통수를 때리고 안 그런척 휘파람을 불면서 지나갔어요 

지금껏 참아왔던 마음 속 꼭꼭 뭉쳐있던 응어리같은게 제 속에서 터져 나오는 기분이 들었죠, 주위에 보는, 애들이 별로 없어서 당장 실행하진 않았지만 언제라도 래리 그 놈을 마구 밟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때가 온겁니다, 점심시간이 되어 식당에서 멍하니 서있던 저에게 래리와 그 패거리 놈들이 웃으며 다가왔죠

그래. 때가 된거야.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평소와 다르게 말도 없고 그 자식들에게 돈도 주려고 하지않았습니다, 래리는 뒤에 애들을 보고는,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자신의 힘을 과시하듯 내 어깨를 강하게 밀쳤습니다. 

얼마나 쌔게 밀었는지 뒤로 자빠졌는데도 안경도 날아가고 주머니 속에 꼬깃한 지폐랑 동전도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흘리고 멍하니 앉아있었습니다, 

그래. 마치 자판기처럼 말이죠

그 망할 래리 자식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래리는 더듬거리며 안경을 찾는 나를 보곤 비웃으며 바닥에 떨어진 1달러짜리 지폐 몇장을 주워서 가버렸습니다

하하.

하하하,

하하.

.. 그래.. 그래요..

지금껏 지내면서 처음으로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흥분. 분노. 어떤 감정이 마구 뿜어져 나오는 기분이 들더군요

부인. 혹시 자살에 실패한 사람중에 대부분이 2차 3차로 자살을 시도한다는 이야기 들어봤습니까? 단순히 죽고싶어서 그런게 아니라 사람이 죽음에 가까워지면 엔돌핀이 과다분비된다고 합니다, 그 느낌을 잊지못하는거죠

순간 주위의 시간이 느려진듯이 느껴졌고 뭉게져서 들리는 애들의 웃음소리와 조롱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내 제 머릿 속에서는 뭔가가 툭- 하고 끊겨버렸어요

저는 미친듯이 웃었고, 제가 마지막으로 기억나는건 그게 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제 온 몸이 피투성이더군요, 내 아래에는 형체를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난도질한 누군가가 깔려있었는데 큼지막한 초록색 점퍼를 보고 알아차렸습니다, 래리 그놈이 항상 입고 다니던거였죠

방금전까지만 해도 모두의 앞에서 날 조롱하고 망신을 주며 비웃었던 이 자식이 내 아래 깔려서 이렇게 죽어버린겁니다

부인. 이게 말이 됩니까? 몇 개월이나 절 괴롭힌 그놈이 단 몇초만에 이렇게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니

식당은 비명으로 가득찼습니다, 모두가 절 보고있었고 저는 그게 평소에 느끼지 못한 저에 대한 다른 시선인걸 알고 있었죠, 저는 그 넓은 곳에서 혼자 킬킬대며 웃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몇분이 지나고나니까 누군가가 제 이름을 부르더군요

내 이름. 내 이름이 뭐였지? 부르는 소리는 분명 내 이름이 맞는데 이질감이 느껴져.. 내 이름은 자판기인데, 나한테 다른 이름이 있었나?..

누가 그렇게 내 이름을 부르다 이내는 목놓아서 소리쳤습니다.

"맙소사.."

"오, 에드.. 제발.."

.. 어머니의 목소리였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청소복을 입은 어머니가 저한테 소리치며 달려와선 들고있던 수건으로 피투성이가 된 제 얼굴을 미친듯이 닦았습니다, 

 

그리고선 내 얼굴을 확인하곤 날 안아주시더니 못 믿겠다는듯이 고개를 저으시고 주위를 둘러보시더니 대걸레로 핏자국을 닦기 시작했어요 

바닥이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었고 이내 어머니는 오열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사실 다 알고 계셨던겁니다

그 이후엔 뭐 경찰 사이렌 소리, 두려움에 벌벌 떠는 아이들의 눈빛, 차가운 감촉의 무언가가 빠르게 스쳐지나갔어요

저는 반쯤 정신이 나간상태로 제 죄를 인정했죠, 어머니는 아들이 그런게 아니라고. 괴롭힘 당하는 자기 아들을 보고는 참을 수가 없어서 자기가 한 일이라고 했지만 본 사람이 몇명인데 그게 말이나 되겠습니까 

뭐 어쨌거나 저는 7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죄질이 나빠 원래 더 무겁게 나와야했지만 그때 일 이후로 자기도 해코지 당할까봐 무서운지 평소에 저를 심하게 괴롭히던 애들이 증언해줘서 감형 사유에 포함된걸 알았습니다.

전 사실 제가 죽인 래리보다도 태연한 척, 안그런 척, 친구인 척 하며 저의 편을 들어주는 걔네들이 오히려 죽일듯이 더 미웠습니다.

이후의 생활은 생각보다 할만했던거 같아요, 교도소는 괴롭힘을 당하던 학교보단 훨씬 나았고 그 사건 이후로 제 안에서는 뭔가가 자라기 시작한건지 제 자신에게 당당해졌습니다 .

틈나는대로 운동도 하고 그러다보니 성격도 바뀌게되어 말이 통하는 사람도 조금씩 생겼고, 모범수로까지 선정되서 2년 일찍 사회에 나오게 됐습니다.

평생 너드로 살 줄 알았던 저는 한번의 용기로 인생이 통째로 바뀐겁니다, 어쩌면 래리 그 놈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고요

그깟 쓰레기 자식 이젠 열명이든 백명이든 내 눈앞에 보인다면 전 망설임 없이 다시 죽일 각오가 되있습니다.

나와서는 평소에도 관심이 많았던 미술쪽에 전념했습니다. 달라진 제 모습과 함께 이름도 바꾸고 길거리에서 무명화가씨로 새출발해서 지내고 있습니다,

 

마음이 진정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혼자 조용히 집중 할 수 있으니까 저한테 더 할 나위 없이 좋더군요

부인.

저는 가끔 꿈을 꿉니다.

살려달라고 빌던 래리의 얼굴을 찢어발길때, 피투성이가 된 그 자식의 목을 사정없이 찌르며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꿈을..

그 놈은 아직도 제 꿈에 나와서 너덜거리는 얼굴로 살려달라고 빌고있습니다, 

놈을 짓밟으며 사정없이 마무리할때 항상 깨는건 좀 아쉽지만 그래도 그 표정은 참 예술입니다, 그런 꿈을 꾸고나면 항상 래리의 망가진 얼굴을 그림으로 그려서 보관중입니다.

부인도 이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한번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만 줄일게요.

누구에게나 힘든 시기는 있는 법이죠, 부인.




PS. 동봉된 우편 뒤에 그림을 첨부했어요


To. 섀넌 래리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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