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평생, 단 3명의 제자를 두었는데, 첫 번째가 일본 관서 기원의 창립자였던, 하시모토 우타로 9단, 두 번째가 현대 바둑의 아버지이자 역대 최고의 바둑 기사로 자주 언급되는 오청원 9단 입니다.
이후 세고에 9단은 오청원이라는 거물을 가르친 이후 30년 동안 단 한명도 제자로 들이지 않았으나, 30년만에 제자로 들인 세기의 천재가 바로 조훈현 9단 이었습니다.
세고에 9단은 조훈현 9단에게 말하길
‘바둑은 중국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에서 꽃피웠다. 내가 다행히 중국의 우칭위안(吳淸源)을 키웠고 일본의 하시모토 우타로(橋本宇太郞)를 키웠지만, 한국에는 은혜를 갚을 길이 없었는데, 네가 한국인이라 은혜를 갚게 됐다.’라고 말했을 정도 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세고에 9단은 조훈현 9단이 군 복무 문제로 귀국한 이후 충격을 받아, 84세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만화처럼 목을 매달아 죽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목을 졸라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는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7월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두 통의 유서를 남겼다. 한 통은 가족에게 “노구로 더 이상 신세 지기 싫어 먼저 떠나고자 한다”는 내용. 또 한 통은 친구, 후배들에게 “조훈현을 꼭 다시 데려와 대성시켜주기 바란다”는 간절한 부탁.
“스승의 부음을 듣고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대들보에 목을 매단 게 아니라 앉아서 스스로 자신의 목을 졸라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역사상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사람이라면 ‘열이면 열 스스로 손을 놓아버린다’는 것이죠. 그만큼 스승은 죽음의 순간에도 무시무시한 의지력을 보이신 분입니다. 친구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자살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아마도 저의 귀국이 90%쯤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을까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한국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상심하셨거든요.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더구나 그 몇 달 뒤에 강아지 때부터 제가 키웠던 아키다견 벵케이가 밥을 안 먹고 비실거리다가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야길 듣고 저도 모르게 주르륵 눈물이 흘렀어요. 벵케이의 죽음으로 선생님의 죽음까지 아주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온 거죠. 그러니 제가 스승 세고에 선생님과, 그에게 가르침받았던 그 귀중한 세월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라이벌 스즈키의 제자인 기타니 문하의 기사들을 꺾고 일본 바둑계를 평정해주길 바랐던 제자의 귀국, 절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자살이 겹친 것이 주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유서의 내용도 조훈현을 다시 데려와서 대성해 달라는 이야기일 정도로, 조훈현의 엄청난 재능에 대해 큰 기대를 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세고에 9단이 조훈현 9단을 스파르타식으로 훈련시켜주길 바랐던 부모님의 부탁에 대한 답장에서 말하길
바둑은 예(藝)이면서 도(道)입니다./ 기량은 언제 연마해도 늦지 않습니다./ 큰 바둑을 담기 위해서는 먼저 큰 그릇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격도야가 우선이지요./ 훈현이의 기재는 우칭위안에 버금갑니다./ 아니 우칭위안을 능가하는 기사가 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 세고에를 믿고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그 오청원을 능가할 재목이라고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참고로 오청원은 하루는 세고에 9단이 머리 좀 식히라고 야구장에 보냈는데 하늘만 보고 있어서 왜 그런가 했더니 하늘을 바둑판 삼아 바둑 공부를 하고 있었을 정도의 천재로, 위의 만화 짤방처럼 세고에 9단이 후에 어떤 천재가 나와도, 천재란, 오청원급은 되야 천재라 말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할 정도였는데, 그런 걸 보면, 조재훈은 어마어마한 재능이다 싶습니다.
이렇듯 9세 프로 입단, 13세 일본 입단(일본 타이 기록, 본래 예정대로 기타니 문하에 갔으면 최고 기록이었을 것이라고) 등 단순히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기록 말고도
조훈현 9단은 그 오청원 9단을 가르친 세고에 9단이 인정한 천재 중의 천재인데다가, 사형이 그 오청원이니 천재에 대한 평이 박한걸로 유명합니다.
「바둑은 일단 천재가 나와야 한다. 그 다음, 그 천재가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재목이 보이지 않는다. 이세돌은 천재가 아니라 독특한 기풍을 가진 ‘천재형’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사형 우칭위안(吳淸源·1914∼)은 천재이면서도 엄청난 노력가였다. 어린시절 얼마나 바둑책을 한손에 들고 많이 보았으면, 왼손 손가락이 기형으로 굽었겠는가. 한번은 세고에 선생님이 우칭위안을 머리 좀 식히라며 야구장에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우칭위안은 야구장에서 야구는 보지 않고, 고개를 젖혀 하늘만 보더라고 했다. 하늘을 바둑판 삼아 바둑공부를 했던 것이다. 그분은 올해 우리 나이로 백한 살이지만, 지금도 검토실에서 ‘이렇게 둬야지’하며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고 한다. 바둑은 천재가 아니면 아무리 키워봤자 소용없다. 죽어라 공부해도 안되는 게 바둑이다.」
이세돌은 천재가 아니라 독특한 기풍을 가진 '천재형'이라며 박하게 평가했고, 현 세대에는 천재가 보이지 않는다고 평가했습니다.
Q: 이창호는 처음부터 재목이라고 생각하고 내 제자로 받아들이신 건가요?
아니요. 처음에는 ‘계륵’으로 생각했어요. 뭔가 아쉬운,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그런 정도로 보였어요. 한데 이렇게 잘할 줄 몰랐죠. 어린 나이에 성실했어요. 창호는 ‘안의 천재’가 아니라 밖에서 ‘보이는 천재’죠.
Q: 안의 천재가 아니라 보이는 부분이 천재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능력만큼의 성실성 같은 것이죠. 창호는 100번 중에 한 번이라도 역전당할 가능성이 있다면 그 판을 크게 이길 수 있어도 그 수를 안 둬요. 창호에게 ‘왜 그 수를 안 뒀느냐’고 하면 ‘자기가 가는 길로 가면 100번 중의 100번을 반집이라도 이길 수 있다’고 하더군요. 이게 답이 될 수 있을 거예요.
“푸하하, 맞아서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제자한테 빼앗기는 게 낫다. 내 시대가 백년 천년 가는 것도 아니고. 그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온 것뿐이다. 아내가 가운데서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창호는 원래 말이 없는데다가, 그런 날은 고개까지 푹 숙이고 있으니…. 보통 천재는 반짝반짝 금방 눈에 띈다. 그런데 창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천재’다. 창호는 자기 바둑수순도 잊어 먹는다. 세상에 그런 천재가 어디 있나. 게다가 창호는 당연히 치고나가야 하는 수순인데 갑자기 하수처럼 물러난다. 난 어이가 없어 야단을 친다. 그러면 떠듬떠듬 말한다. ‘그렇게 하면 싸움이 붙고, 그러다가 아차하면 역전 당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물러서면 2, 3집밖에 못 이기겠지만, 결코 지는 일은 없다’고. 맞다. 끝내기는 정상급기사라면 누구나 잘한다. 하지만 창호는 반집을 지고 있는 상황에서, 보이지 않는 0.7집을 알고 그 수순을 밟아간다. 그래서 결국 한집을 만들어낸다. 평범한 바둑 같은데 볼 건 다 본다.”
이창호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늦게 입단했고 의구심이 들었지만 포기는 할 수 없는 계륵 같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천재관이 바뀌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천재일뿐 이창호도 천재라고 평가 하셨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다른 대가(大家)들의 이창호에 대한 평가가 조훈현의 그것과 상당히 흡사하다는 점이다. 연초 타계한 기성(棋聖) 오청원(吳淸源) 선생은 생전 이렇게 말했다. “이창호는 수년간의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 천재일 뿐이다. 진정한 천재를 꼽는다면 역시 조훈현이다.” 오청원은 심지어 조훈현 다음 자리에조차 이창호를 뒤로 밀어내고 오다케(大竹英雄)와 린하이펑(林海峰)을 올려놓았다.
‘괴물 기사’로 불리는 후지사와(藤澤秀行)의 생각도 오청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자신의 실전적 제자인 조훈현을 가리켜 “바둑의 재능만 놓고 본다면 훈현이는 나와 비견할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인물”이라고 자주 말했다. 그가 이창호에 대해 언급한 기록은 찾아내지 못했다. ‘철의 수문장’이란 별명과 함께 중국 바둑의 현대화를 앞장서 이끌었던 녜웨이핑(聶衛平)도 “조훈현은 진정한 천재, 이창호는 노력하는 천재”라는 이분법(?)을 들고 나왔었다.
이처럼 이창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천재, 조훈현은 불세출의 천재로 평가받는 경향은 타국 기사들의 평에도 잦긴 합니다.
조훈현의 안타까운 점은 역시 전성기 나이에 군 복무로 인한 부재와 조훈현 제외 듣보잡 취급을 받던 한국 바둑이라 국제기전에 자주 나가지 못했으며,
한국 바둑의 위상을 일거에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 응씨배 우승도 격렬하게 항의해서 겨우 조훈현 하나의 초청장만 받았다는 것... 그때 나이가 38세로 이 응씨배 우승으로 조훈현은 세계 최강의 기사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40 넘어서도 제자인 이창호와 최고의 자리를 다투었는데 이창호가 30살이 넘어서 세계 최강의 자리에 내려오기 시작한걸 생각하면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긴 합니다.
이처럼 세기의 천재들만 제자로 받는 세고에 9단의 3번째 제자 조훈현
응씨배 우승으로 한국 바둑의 위상을 끌어올리고 정치한다 싶더니 바둑 진흥법만 통과시키고 정치에서 발뺀 진정한 바둑계의 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