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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커뮤니티를 보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보곤 합니다.

 

그런 글을 읽을 때 마다, 참으로 힘들고, 어렵고, 가난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많다고 느끼곤 합니다. 저 역시도 그런 부류중에 하나 이지 않을까 합니다. 저 역시도 언젠가 기회가 될때 이야기 한 번 써 볼까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미루고 미루다가, 이번에 한 번 써 보려고 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말할 수도 없는 내용이 많고, 딱히 말 할만한 곳도 없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나마 몇자 끄적여 봅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을 하신 적이 거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의 학창시절은 언제나 가난했었다고 하더군요 

 

할아버지가 무슨 맘으로 일을 시작하셔도, 한 달을 넘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만큼 일을 안하셨습니다. 그래서 할머니의 품팔이와 친가에서 받은 땅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할아버지는 도박, 술, 여자 이 모두를 정말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안 그래도 그 시절에 형제 자매도 많이 낳던 시절인데, 할머니 혼자서 키웠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라고 하셨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당시 농고를 졸업해서, 곧장 취업을 하셨고 중장비 기술을 익혀 일을 시작 하셨습니다. 꽤나 유망했던 직종이었기에 돈벌이가 아주 괜찮았다고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IMF가 터졌는데, 모두가 위기였던 그 시절에, 우리 집안은 엄청 잘 살게 됩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쯤, 아버지는 다니던 회사를 구조조정으로 인해 퇴사 하셨고, 그렇게 같이 퇴사하게 된 사람들과 의기투합 하여, 다니던 회사의 하도급 업체를 창업하셨고, 회사를 잘 다니던 때 보다 돈을 훨씬 많이 벌게 되셨다고 합니다.

 

언젠가 아버지께서 통장에 찍히신 월 급여 내역을 보여 주셨던 기억이 있는데, 당시 월에 약 800만원 정도가 달달이 찍혀 있었고, 지방 도시였던 제 고향은 그 시절에 신축 아파트 매매가가 3,000만원 정도 밖에 안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이따금 그 당시에 신축 아파트 몇 채를 사 두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 한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3억 가까이 올랐기 때문 입니다. 

 

여하튼 당시에도 학창시절을 보낸 오래된 판자촌 자가주택에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사셨고, 돈을 쓰는 것을 배운 적 없고, 그저 아끼는 것만 배우셨던 아버지는 당시에도 이사 가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도 않으신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열심히 사셨지만 집안의 위기는 황당한 곳에서 벌어지게 됩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저희 친어머니는 전업주부로 계모임을 시작 하셨는데, 당시 가난한 동네였던 고향 마을의 주부들은 계모임을 자주 하곤 했습니다.

친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셨기 때문에, 어울리던 계모임 멤버들과 나이 차이가 조금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해당 모임에서 어울리기 위해서 계모임 비용을 조금 더 지불하게 되었는데, 여기엔 아버지가 돈을 잘 번다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당시 계모임의 모임 장소는, 동네 슈퍼의 안방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슈퍼에 납품을 위해 출입하는 젊은 남자가 자주 오곤 했습니다.  

당시 어렸던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그 젊은 남자와 바람을 피웠는데, 할머니가 어디서 알게 된 이야기로는, 해당 계모임의 멤버들이 그 관계를 적극적으로 도와줬다고 하셨습니다. 

그 납품하던 남자 직원을 어릴 때 본적 있었는데, 제가 언젠가 굉장히 아픈 적이 있었는데, 출근한 아버지 대신하여 그 남자직원의 차에 타고 종합병원에 갔다 온 기억이 있습니다. 

그 남자의 차는 당시 그랜저였는데,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그 차는 제 어머니가 사줬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당시에 제 아버지가 타고 다니던 차는 갤로퍼 였습니다. 차 뿐만이 아니라, 그 남자의 집도 친어머니가 얻어줬다고 합니다.


그 남자직원은 나중에 다단계를 했었고, 거기서 중간 관리자 정도로 올라갔다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어머니도 따라가선 다단계를 하셨고, 초등학교 5학년 쯤 집이 뒤집어 질 정도로 난리가 났던 것으로 기억이 나곤 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엄청 크게 싸웠고, 외할머니도 집에 와 계셨던거로 기억이 나는데, 결국 어머니는 그 길로 집을 나가셨고, 아버지는 저와 남동생을 불러서 앉혀놓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제 같이 못 살게 되었으니, 어머니를 따라갈 생각이거든 여기서 죽으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칼을 들고 계셨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저는 동생을 등 뒤로 숨긴 것은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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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아버지가 예전에 삼촌과 싸울 때, 칼을 꺼내신 적 있어서 꺼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긴 합니다. 

제 기억에는 당시 할머니와 외할머니가 울면서 말렸던 기억이 있는데, 재작년 쯤 할머니와 이야기 해보니 할머니는 정확히 기억이 안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이후로 아버지가 불편하게 느껴졌고, 우리집은 결국 초등학교 6학년 때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아버지는 다른 동네의 친척 집을 당시 기준으로 좀 싸게 사서 이사 가셨고, 1억 중반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다단계를 계속 하셨고,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혼 시점에 집에 큰 빚을 남기셨고, 아버지는 결국 그 빚을 갚아 주셨다고 들었다. 이혼을 하면 굳이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알고 있었는데, 왜 인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갚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중학교 1학년이 되었고, 공부를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1학년 1학기가 지나도록, 공부를 하는 방법도 전혀 몰랐고 집중력 조차 없었습니다.

 

집에 제가 원하는 것이나 갚고 싶은 것이 생겨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도 못하는 성격 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삶에 목표가 없었던 것이 크지 않았나 생각하곤 합니다.

당시 전교생 기준으로 130등 정도를 했었고, 성적표를 보셨던 아버지의 주먹에 흠씬 맞았던 걸로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는 안되겠는지, 2학기부터 종합학원에 보내 주셨는데, 다행히 머리는 나쁘지 않았는지 2학기 성적은 전교생 기준 20등 정도를 하게 됩니다. 그 이후로 고등학교를 갈때까지 전교에서 30등 정도에 계속 머물렀던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가 나가신 뒤, 집안 살림은 할머니가 맡아서 하셨고, 할아버지는 초등학교 때 돌아 가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당뇨에 걸리셔서 발가락부터 시작해서, 결국 다리를 절단 하셨지만, 그럼에도 술을 끊지는 못하셨고, 한 쪽 다리가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셨습니다. 

어느 날은 저한테 찬장 위에 담궈둔 석류주를 약이라며 내려달라고 하셨는데, 그게 술인 걸 알았던 저는, 내려드리지 않았고, 할아버지는 화가 나셔서 저에게 고함을 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중에 친동생이 할아버지에게 술을 내려 드렸다고 하더군요. 초등학교 저학년인 친동생은 할아버지 말을 그대로 믿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중학생 때 전 한달 용돈 2만원 정도 받았고, 거기서 학교 준비물이나 간식 같은 것을 해결 했고, 저는 그때고 지금이고 집에 손 벌릴 줄을 몰랐는데, 집이 어려웠던 만큼, 손 벌린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이 되고, 우리집엔 새 어머니가 오셨습니다. 저는 아직까지도 새 어머니와 친하지 않으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새 어머니는 노래방 도우미 출신이라고 했습니다. 

그 시점부터 우리 집안 살림은 새 어머니가 하셨고, 새 어머니에겐 딸이 둘 있었는데, 둘다 저보다 누나 였습니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새 어머니는 제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 합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올라갈 무렵, 아버지는 인문고 진학을 강하게 원하셨습니다. 지금까지 글을 읽은 사람들은 알겠지만, 아버지가 강하게 원하는 건 일반적인 기준이 아닌, 욕설이나 폭력이 동반되는 행위 라는 것 입니다.

아버지는 제게 인문고에 가지 못한다면 그냥 죽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결국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야간 자습을 하면서, 주중이고 주말이고 아침 8시에 학교에 가서, 밤 10시에 집에 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짧게라도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습니다.

 

주어진 스케쥴에 맞춰 살기 바빴던 저와 달리, 친동생은 실업고 진학하여 학교를 마치고, 저녁에는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제가 대학생이 되기 전 까지, 금전적으로는 동생이 훨씬 풍족 하였습니다.


동생은 알바비로 옷을 사는걸 좋아했고, 고등학생 때는 옷장사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현재는 먹는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저는 속옷이 다 헤져서, 동생 걸 입었고, 옷은 친척 형이 물려준 티셔츠 몇 장과 여름바지, 겨울바지 각각 1개가 전부 였습니다. 

그 와중에 참으로 다행인 건, 학교는 교복을 입고 다녔다는 것 이었고, 패딩 점퍼는 교복을 입고 다니면서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고등학교 2학년이 다 지나갈 즈음에, 제가 입고 다니는 옷이 저게 다라는 걸, 아버지는 물론 새 어머니도 그때 아셨지만 변하는 건 없었습니다. 가끔 집을 돌아다니다 보면, 안방에 옷 쇼핑백이 가득 했던 걸로 기억이 나는데 말이죠. 

고등학교 3학년이 되고, 당시 이명박 대통령 집권 시절에,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일어나게 됩니다. IMF로 흥했던 우리집은, 이제 반대로 가세가 기울게 되었고,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중장비 사업을 정리하면서, 중장비 전부를 처분하셨습니다. 그 돈으로 직원들 퇴직금을 지급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후 아버지는 음식 장사를 하셨지만, 적자로 거의 바로 정리하시고, 현재는 중장비 경력을 통해 다른 회사에 취업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아는 지인 통해서 입사하게 되었는데, 당뇨 병력이 있어서 취업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대학교에 진학을 해야 할 시기에, 제 성적은 인서울에 진학할 정도는 되었지만, 그 당시에 가세가 기울어진 집안이 걱정 되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지방의 국립대, 취업이 잘 되기로 유명한 대학교에 진학하게 됩니다. 

그때 학비, 생활비, 기타 잡비와 같은 부분들은, 어떻게든 아르바이트를 뛰면서 어찌저찌  감당이 가능 했지만, 돌이켜보면 대학을 다닐 때, 제 인생에 가장 힘든 시기 였습니다.

정말 돈이 들어가는 일은 많았는데, 이것을 공부 하면서 충당 하기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영어학원을 다니거나 교환학생을 갈 준비를 할 때, 저는 다른 스펙을 올릴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그저 빠르게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해서 암울한 집을 나오는 것이 목표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동생은 고등학교 졸업 후 취업 했지만, 곧장 퇴사 후 2년제 대학교에 진학했고, 졸업 후 삼성 1차 하청 반도체 업체로 취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도 차라리 실업계 쪽으로 진학 할 껄, 이라는 생각으로 크게 후회 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대학생이라 다행인 건 고등학생 신분으로는, 월 2만원으로 집 밖에 돌아다닐 수가 없었지만, 대학생 신분에는 할 수 있는 알바가 많은 편이라 다행이었습니다.

 

대학교 2학년에 올라간 뒤로, 운동을 시작 했는데, 투기 종목이었고 이게 의외로 적성에 맞았습니다. 학교에 8시에 셔틀버스로 통학하고, 수업듣고 공강 시간에는 도서관에서 학교 공부, 시험 공부에 매진 하였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7시부터 체육관에 틀어 박혀 운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11시에 체육관 문 닫을 때 나와선 집에 가자마자 잠에 취해 잠들었습니다.  

평일에 특별한 일 없으면 이런 스케줄로 보냈고, 주말에는 아침부터 새벽 늦게까지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대학교 3학년이 되어서, 저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손을 내 밀게 됩니다. 

졸업 요건에 맞추기 위한 공부와, 그 후 취업 스펙을 올리기 위한 준비를 하려면, 조금이라도 공부 시간을 늘려야 했는데, 그럴려면 주말에 아르바이트 시간을 줄여야 했고, 그래서 졸업할 때 까지만, 월 20만원을 요청했고 나머지는 최소한의 아르바이트로 충당 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바로 새 어머니에게 달 마다 입금 해 주라고 하셨지만, 결국 새어머니는 단 한푼도 보낸 적이 없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얼마전에 알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졸업 때 까지 보낸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대학교 4학년이 되었고, 어찌 된 영문인지 학교에서 제 앞으로 장학금이 나왔습니다. 그 동안 부모님 수입 기준과 다른 여러가지 기준에 걸려서, 계속 거절 당했는데 통장에 입금이 되어서 너무 기뻤습니다.

통장에 등록금 기준 180만원 가량 입금 되었고, 이 돈을 어떻게 쓸지에 대해 행복한 고민 하면서, 기뻐하던 것도 잠시, 학과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받아 보니까 저에게 이미 다른 곳에서 장학금이 입금된 내역이 있으니, 받은 장학금을 반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무슨 소린가 했는데, 새 어머니가 매 학기 초에 등록금 남입 명세서를 달라고 했었던 일이 있었는데, 저는 그때까지 그 걸로 세금 공제를 받았나보다 했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동사무소에서 나오는 부녀회 장학금이 있었고, 그걸 따로 신청해서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새 어머니를 알게 된지 10년이 지났는데, 처음으로 저는 진심으로 분노해서 새 어머니에게 불 같이 따지게 되었습니다. 미안해 할 줄로 알았던, 새 어머니는 조용히 듣기만 하더니, 할 이야기 다 끝났냐면서, 더 할 이야기 없으면 끊겠다고 했습니다. 

전 그 날 초등학생 이후로 처음으로 펑펑 울었습니다. 부끄럽게도 학교 복지회권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서 울었고, 20대 중반에 아저씨 같은 놈이 다 커가지고 쭈그리고 앉아서 오열하다 싶게 울었던 것 같네요  

 

그렇게 너무도 힘든 대학 생활을 끝으로, 27살에 취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엄청 삐까뻔적한 대기업은 아니었지만, 그 지역에서는 기반이 단단한 기업으로, 현재는 일도 할만해서 5년차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저는 취업과 동시에 고민도 없이, 회사 기숙사로 들어 갔습니다. 아마도 회사 기숙사가 없었으면, 이렇게 바로 나오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취업을 준비하던 당시에도 저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지만, 월급 전까지 한 달에서 두 달 정도 텀에, 생활비도 빠듯 했었기 때문 입니다.

물론 그때도 아버지와 새 어머니도, 제가 사정이 어려운 것을 알고 있었을거라고 생각하지만 지원은 단 한푼도 없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친 할머니가, 제 동생에게 부탁해서 얼마라도 줘어 주셨는데, 생각해보니 저 면접 볼 때 정장도 할머니가 해 주셨습니다. 

친 할머니도 새 어머니가 살림을 시작하고, 10년이 넘게 국민연금으로 생활하고 계셨는데, 놀랍게도 아버지는 할머니에게 계속 용돈을 주고 있었다고 알고 계시더군요.


제가 취업하고, 약 3개월 만에 할머니는 그 집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새 어머니에게 10년이 넘게 구박을 받았지만, 자기라도 이 집에 없으면 우리 처지가 더욱 심해질 것을 염려해 버티셨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이제야 일을 시작했으니, 이 집에 이렇게 있을 필요가 없다고 하셨고, 그렇게 나오기 전에 일련의 사건이 있었던거 같지만 자세히 알지는 못 합니다. 

그렇지만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저는 온전히 할머니의 편에 서 있기 때문에 별 생각은 없습니다.  

아버지는 이제 친척들과 왕래가 끊긴 상태 입니다. 새 어머니 문제로 인해 친척들과 몇번 싸웠다고 들었고, 솔직히 저 조차도 명절이 아니면 집에 가질 않습니다. 명절에 가는 것도 할머니가 그래도 가보라고 하셔서 가는거지, 할머니라도 안오시면 더더욱 갈 일이 없지 않을까 합니다.

이제 지긋지긋한 돈 걱정, 먹고 살 걱정은 없지만, 솔직히 연애도 취업 후에는 여러번 했지만, 이제는 여자를 믿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운 좋게 결혼을 한다고 해도, 남들처럼 잘 살 수 있을까 자신도 없구요

인터넷에 보면 더 어렵게 사는 사람들도 많아서 부끄럽지만, 제 이야기를 다른 지인들에게 하지 못해, 답답한 마음에 글을 한 번 써 봤습니다.

이렇게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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