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딥한이야기/공포

진시황은 죽었습니까?

여러이야기 2022. 6. 13. 00:14
반응형

예전에 학교 중국어학과 교수님에게 들었던 기묘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단순히 중국어만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문화, 지역, 역사와 같은 지식도 굉장히 해박 하셨습니다. 

 

젊었을 적엔 직접 중국에서 이곳, 저곳을 돌아 다니셨지만, 현재는 나이가 많으신 관계로 그렇게까진 활동을 하고 계시진 않으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교수님께 직접 들었던 이야기는, 교수님이 아직 젊었을 적 이야기 입니다. 

 

요즘에야 중국의 이곳 저곳을 여행 한다는 것은 꽤나 쉬운 편 이지만, 92년도 즈음에는 굉장히 어려운 일 이었습니다. 실제로도 중국은 공산주의 이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종북주의자들이 중국을 통해 북한으로 밀입국 하거나, 주체사상을 배워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시기 였습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중국을 방문하려면 굉장히 까다롭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가능했고, 동시에 비용도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교수님은 그런 복잡한 절차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자신과 뜻이 맞는 2명의 지인과 함께 편법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중국으로 직항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동남아-> 중국으로 경유하여 입국하는 것 이었습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어 미리 말해 두겠지만, 교수님이 중국을 이렇게 편법을 쓰면서 까지, 여행하고자 했던 이유는 그 당시 젊고 순수했던 학자의 열의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중국은 정말로 미지의 세계나 마찬가지 였기 때문에, 대학생은 물론, 관련 학자들 조차 몇 십년 전의, 아주 옛 것의 교제를 공부해야 했을 정도로 중국의 문화 연구는 상당히 열약한 상황 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궁금증으로 인해 중국 여행을 계획한 것이지, 절대로 불순한 의도가 있으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던 것이, 계획했던 한국-> 동남아-> 중국 루트가 동남아 입국 심사가 탈락하게 되었던 것 이었습니다. 그 당시 한국은 굉장히 못사는 나라였기 때문에 그로인해 불법으로 취업하는 문제가 심했던 것이 화근이었던 것 이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동남아는 패스하고 일본을 거쳐 가는 루트로 다시 계획을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잘은 모르겠지만, 일본에서 동남아로 넘어가는 것은 수월했다고 했기에 그런 계획을 세웠는데, 그 마저도 입국 심사를 탈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거의 반 포기 상태로 있었는데, 어떤 제일동포 한 분이 자신과 함께 가지 않겠냐고 제안을 하였고, 그 사람은 일본과 동남아를 오가며 보따리 장사 같은 것을 하고 있었는데, 그 쪽 관리가 굉장히 썩어 있었기 때문에, 적당히 뇌물만 찔러주면 장사꾼 너댓명 정도는 눈감아 준다고 하더랍니다.

그 이야기에 혹하게 된 교수님과 친구분들은 단번에 오케이하고, 곧바로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도 있었지요

 

그래서 다행스럽게도 그 방법을 통해, 동남아까지는 무사히 도착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어떤 일로 인해, 중국 입국이 힘들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까지 와서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기에, 또 다시 불법적인 루트를 찾으면서, 결국 중국까지 무사히 데려다 줄 수 있는 브로커를 찾게 되었습니다.

 

중국 밀입국 브로커가 말했던 루트는 이랬습니다. '강을 지나서, 밀림을 지난 다음에, 중국에 작은 마을까지 데려다 주겠다' 어쨋든 거긴 울창한 밀림 지역이기 때문에 중국의 공안도 잘 찾아오지 않는 오지라고 하더군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리저리 돌아 다니기도 수월하고, 걸릴 일도 없을 거라고 하더랍니다. 교수님과 친구분들은 결국 동남아에서 중국으로 밀입국을 시도하게 됩니다. 브로커는 트럭과 지게차를 번갈아 타고 갔는데, 처음엔 일본의 가전제품을 파는 상인으로 자기를 소개 하였는데, 중국은 외부의 고가 사치품에 굉장히 민감하게 생각 한다고 하더군요

 

중국의 상류층들이 그런 사치품을 사 모으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그것이 상당히 돈벌이가 된다고 했습니다. 교수님은 그 말만 믿고 따라갔는데, 동행한지 4일이 지난 후에 우연히 짐을 보다가, 중국 브로커가 뭘 밀수하는지 발견 했는데, 다름 아닌 '마약' 이었습니다.

 

일본 전자제품을 밀수 한다는 것은 완전 거짓말 이었습니다. 이쯤되자 점점 불안해 지기 시작했는데, 중국에서 마약은 굉장히 민감한데, 아편전쟁 이후로 마약은 소지만 하고 있어도 내국인, 외국인 할 것 없이 무조건 사형에 처해 지기 때문 이었죠

그래서 당연히 교수님과 친구분들은 극도의 불안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잘못 걸리면 그 즉시 모두 사형에 처해지는데, 설상가상으로 브로커는 총까지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간 입막음을 하기 위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일단 교수님과 친구분들은 이 브로커에게 도망 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마침 밀림을 지나고 있었던 터라, 사람 하나 지나가질 않았고, 멀리서 조용히 숨어버리면 못 찾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새벽에 브로커가 잠을 든 틈을 타서 앞도 보지 않고 숲으로 도망 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교수님과 친구분들이 살고 싶은 욕구가 너무 큰 나머지, 정말 앞만 보고 도망친 관계로 그만 길을 잃어버렸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밀림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던 것 이었습니다. 숲에 숨어 있다가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면 될 거라고 가볍게 생각했던 것이 화근이었죠

 

오지의 밀림이란 그리 쉽게 생각해선 될 곳이 아니었고, 결국 헤매고 헤매다가 우연히도 강을 발견하여 그 강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언제고 마을이 나올 것이라 생각하여 무작정 강을 따라 걷기 시작 했습니다.

 

당시에 먹을것이 전혀 없었던 상황에서 밀림에 나무 열매나 강의 물고기, 가재 같은 것을 먹으면서 배는 그럭저럭 채울 수 있었으나, 문제는 '물'을 공급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당시 중국의 물은 수질이 굉장히 좋지 않기로 유명 했습니다. 강 자체가 흙먼지가 가득 끼어있기 때문에, 물을 끓여 먹는 '차'의 문화가 발달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죠

 

하지만 결국 목이 말라, 강물을 먹기 시작 했는데, 이로 인해 매일 같이 설사에 시달렸습니다. 물로 갈증을 채워도 의미가 없는 것이, 설사를 지속적으로 하게 된다면, 탈수가 오기 마련 입니다. 결국 교수님과 친구분들은 3~4일이 지나고 정말로 죽기 직전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이, 그렇게 죽기 직전에 가까스로 저 멀리서 아이들이 발가 벗은 상태로 놀고 있는 것을 발견 하였고, '이제 살겠구나' 라는 생각에 어떻게든 도움을 청하려고 막 달려갔는데, 갑자기 아이들이 미친듯이 도망을 치기 시작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단순히 놀라거나 무서워서 도망치는 느낌이 아니라, 무슨 호랑이 같은 산짐승을 본 것처럼 무섭게 도망을 치더랍니다. 그럼에도 교수님과 친구들은 '여기서 저 아이들을 놓치면 우린 죽는다'는 생각에 죽기 살기로 무작정 쫓기 시작 했고, 탈수로 힘이 없음에도 어른이라는 이점을 통해 아이들을 쫓는 것이 가능 했습니다.

 

아이들이 갑작스럽게 벼랑 틈으로 숨는 것을 보았고, 급하게 따라가서 보았더니 조그마한 촌락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이 그 당시 시대에서 봐도, 아주 옛 시골마을을 보는 것 같았답니다. 벽도 황토벽으로 되어있고, 지붕도 초가집으로 되어 있었는데, 마침 그 마을 어른들도 놀란 표정으로 우르르 몰려왔다고 합니다.

 

죽기 직전에 사람들을 발견한 것에 반가워서, 마을 사람들을 붙잡고 도와달라고 사정을 하기 시작했는데, 교수님은 불현듯 '식인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일단 기본적으로 교수님은 중국 여행을 전면적으로 계획 하셨을 만큼, 어지간한 중국어도 능통했고, 한자도 많이 아셨기 때문에 자신감을 갖고 이 여행을 추진 하셨을 만큼, 언어, 역사, 문화 이 모든 것에 능통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수님이 알고 계시는 모든 중국어를 총 동원하여도 도저히 마을 사람들과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 이었습니다. 일단 급한데로 지금 몸 상태가 말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바디랭귀지를 통해 열심히 설명을 했고, 마을 사람들이 조금씩 경계를 풀고 물과 음식을 가져다 주었다고 합니다. 

 

약간의 정신이 돌아온 뒤에 그 마을의 '촌장'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이 왔는데, 이 사람이 하는 말에 방언이 너무 심하여 마찬가지로 도저히 알아 들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분명히 중국어가 맞기는 한 것 같은데, 알아 들을 길이 없는 언어로 계속 이야기 하는 것 같더랍니다.

 

그런데 이 촌장이 갑자기 계속 한 가지만 말하기 시작 했는데, '찌뿌지워화워찌우잉?' 교수님이 이런 늬앙스라고 하셨습니다. 그저 알아 들을 길이 없는 중국어였고, 그 어떤 말을 하고 물어보아도 돌아오는 답변은 '찌뿌지워화워찌우잉?' 이라고만 답했다고 합니다. 

 

배가 고프다고 하여도 '찌뿌지워화워찌우잉?',여기가 도대체 어디냐고 물어도 '찌뿌지워화워찌우잉?' 계속 이 말만 되풀이 했다고 하는데,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답답해서 메모장과 볼펜을 꺼내서 다시 이번엔 '글'로 대화를 시도 하려고 했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과거에도 언어가 통하지 않을 때, 한자 문화권에서는 종종 이렇게 한자를 통해 필담을 했다고 합니다. 촌장은 메모장과 볼펜을 신기해 하면서 무언가를 열심히 적었다고 하더군요 

 

그럼에도 이 촌장이 쓰는 한자도 정말 듣도 보도 못한 한자라서 마찬가지로 알아 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대화를 하려고 했으나, 교수님과 촌장 둘 다 지칠대로 지쳐서 결국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그 마을에 묵으면서 몸을 회복하기로 했는데, 지내다 보니 조금 이상한 점을 발견 했다고 합니다. 그 마을 사람들 모두가 교수님과 친구분들이 입고 있던 옷이나 물건들을 굉장히 신기하게 보았다고 하고, 마을 사람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가 털이 수북해서 원숭이를 보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근처에 나무나 벼랑이 많았는데 다른 도구 없이 아주 쉽게 올라가는 등, 흔히 말하는 대륙의 기상을 보는 것 같았다고 하더군요

 

몸이 많이 회복되고, 먹고 자는 부분이 해결 되면서, 잊고 있던 학구열이 돌아온 교수님과 친구분들은, 기회다 싶어서 마을 이곳 저곳을 많이 돌아 다녔다고 합니다. 마을에서도 굳이 말리는 사람도 없었구요

 

마을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노동요 같은 느낌의 동요를 자주 불렀는데,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최대한 비슷하게 외우려고 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도움이 될 것을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마을에 며칠 지냈는데, 마을 촌장이 다시 찾아오면서 바디랭귀지로 열심히 이야기를 하는데, 눈치 껏 알아챈 내용이 '너 괜찮다', '여기 살아라', '내 딸 준다.' 였다고 합니다.

 

이런 오지 마을엔 최대한 근친상간을 피하고자 이렇게 잘못 들어오는 외국인과 결혼 시키려는 풍습이 있었나 봅니다. 그저 탐구심에 찾아온 이 오지 마을에, 결혼하고 살라는 것 자체가 황당했던 교수님은 거짓말로 자신은 이미 결혼을 했다는 바디랭귀지를 열심히 표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촌장은 전혀 문제 될 것 없는 느낌으로, 자신의 딸을 둘째 마누라로 삼아 달라는 바디랭귀지를 표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만간 떠날 것이라는 설명을 했는데, 갑자기 촌장이 화를 내면서 '너네들 못가', '여기서 살아야 해', '안 그러면 죽어' 같은 무시무시한 표현과 표정으로 협박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수님과 친구들은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왔는데, 또 다시 죽게 생겨서 마을 사람들이 밭일을 하는 틈을 타 또 다시 밀림으로 도망쳤다고 합니다. 다행히도 미리 먹을 것을 챙겨왔기 때문에 저번처럼 죽을만큼 굶주리지도 않았고, 오지 마을에 꼼짝 없이 잡혀 살기도 싫었기 때문에, 무작정 밀림으로 도망쳤다고 합니다.

 

밀림을 며칠을 헤매고 있었는데, 운 좋게 숲에서 동남아 밀렵사냥꾼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에게 도와 달라고 빌었고, 다행히도 밀림을 빠져나와 동남아에서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무사히 귀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젊을 적에 중국에거 개고생 했던 것을 추억 삼아 이렇게 수업 시간마다 자주 이야기 한다고 하셨죠

 

물론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반응형

중국의 소수민족은 외부에 손님이 오면, 자신의 딸이나 아내를 빌려주는 일도 흔했고, 만약 거절을 하면 자신의 성의를 무시한다는 생각에 칼부림 나는 일도 흔했다고 합니다.

 

무사히 귀환했던 교수님은, 그 후로 학자로서 활동을 하면서, 몇 번 더 중국을 방문 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번에는 그런 개고생하는 불법적인 루트가 아니라, 안전한 합법적인 루트를 통해 방문을 하셨죠

 

추후에는 한중수교가 맺어지면서, 정식으로 중국 여행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런 위험 천만한 여행을 할 이유도 없었죠 

 

그런데, 그 즈음에 어떤 중국 교수분이 중국 지방의 방언이나 한자를 연구 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좋은 연구자료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합니다. 교수님은 마침 그 당시에 메모장에 오지마을의 촌장이 써 두었던 한자와 자신들이 보고 들었던 문화를 이야기 하면 좋겠다 싶어서 그 교수님을 직접 찾아뵈었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그 중국 교수님은 굉장히 흥미로워 하면서 자료들을 보기 시작 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수님 조차도 메모장에 쓰여있는 한자를 도저히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다른 교수들에게 자문을 구하기 시작했고, 그 중 한 교수님이 주의 깊게 그 글을 읽어 보더니, 이 것을 어디서 났냐고 되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교수님은 자신이 젊었을 적, 이래저래 굉장히 고생해서 들어간 마을에서 알게 된 것이라고 하셨고, 중국 교수님은 이 한자는 일반적인 소수민족 한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이 한자는 지금은 사멸한 '진'나라 시대의 통용되던 고대 한자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번역을 해 본 바에 의하면, 메모장에는 진나라 한자로 빼곡하게 문장들이 반복 되어 있었는데... 

 

'진시황은 죽었습니까?' 
'진시황은 죽었습니까?' 
'진시황은 죽었습니까?' 
'진시황은 죽었습니까?' 
'만리장성은 얼마나 쌓았습니까?' 
'만리장성은 얼마나 쌓았습니까?' 
'만리장성은 얼마나 쌓았습니까?' 
'만리장성은 얼마나 쌓았습니까?' 

라고 쓰여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중국 학자들은 한번 발칵 뒤집히게 되었는데, 옛 중국에는 전설처럼 모인(毛人)의 설화가 내려져 오고 있다고 합니다. 일종의 상상의 동물인데, '진'나라 시대의 만리장성 부역을 피해 도망친 사람들이 숲으로 들어가서 마치 원시인처럼 털로 뒤덮여서 살고 있다는 설화 입니다.

  
그들은 자손대대로 숨어 살면서, 현재까지도 진나라 시대 때라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만리장성을 쌓고 있다면, 그렇게 자신들도 발각되면 그 부역을 다시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죠  

'진'나라가 망한 뒤에 무려 몇 천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말입니다.  

그 후에 교수님은 다시 문화 연구를 위해 중국을 다니다가, 어디 만주 지방 쪽을 들르셨는데, 우연히도 거기서 만주어랑 중국어가 굉장히 유창한 할머니 한분을 만났고, 만주어는 지금 사멸 위기인데다가 할줄 아는 사람도 얼마 없어서 위기에 놓은 언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젊었을 적 당시 상황이 굉장히 비슷했고, 그 할머니를 자주 찾아뵈면서 이런 저런 연구를 하는데, 어느 날 할머니가 유독 귀에 익은 노래를 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 때 마을에서 들었던 그 노동요 였던 것 이었고, 다행히도 가사는 만주어 였는데, 뜻은 이랬다고 합니다.  

'만리장성을 쌓아라, 높게높게 쌓아라' 뭐 대강 이런 뜻 이었고, 곧 바로 할머니에게 물어 보았는데, 할머니는 그 노래를 '어머니'와 '언니'들에게 배웠고, 만주에서 부르던 노래는 아니고 옛 중국 노래라고 하셨습니다. 가사만 만주어로 바꿔 불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어떤 중국인이 가르쳐 줬는지 물어봤는데, '중국인이 가르쳐준 노래가 아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주 먼 옛날에 원숭이들이 가르쳐준 노래다" 라고 하셨습니다..

원숭이들이 '모인(毛人)'을 가르키는 지는 교수님도 모른다고 하셨고, 전설은 전설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오지에 깊게 숨어 지냈기 때문에, 진나라가 망했어도 그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없었고, 목숨을 건 노역을 피하기 위해 꼭꼭 숨어 있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에 걸쳐 외부와 격리 된 채로 그런 모습으로 아직까지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물론 지금도 드 넓은 중국 대륙 그 어딘가에는, 현재까지도 진시황이 불로초를 통해 살아있고, 만리장성을 쌓고 있는 중이라 믿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외부와 단절되어 그렇게 지낼지도 모르겠습니다..

반응형
반응형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5/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