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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모님은 제가 초등학교 2학년때 이혼 하셨습니다. 이혼하기 전 까진 방 하나에서 셋이서 다 같이 살고 있었지요. 그 후에 어머니는 집을 나가셨고, 저와 아버지는 함께 살게 되었지만, 이따금씩 모르는 아주머니가 오시고는 했습니다.
아주머니가 오시는 날 마다 저녁엔 운동을 하는 듯 신음소리가 났는데, 저는 어머니가 돌아오셨나 깨고 나서 "엄마!!"를 외치며 다가갔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건 아버지의 폭력이고, 그때마다 저는 다시 조용해지며 잠들곤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정말로 어머니가 돌아오셨고, 저는 너무 기쁜 마음에 편지에 '이렇게 우리 다 같이 살면 좋겠다' 라고 어린 마음으로 써서 드렸지만, 다음 날 법원에서 정식으로 이혼을 하셨고 그 날 저는 어머니를 따라 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새로운 아저씨 집에 절 데려 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은 저녁에 밥을 먹는 도중에 앞으로 아저씨라고 부르지 말고,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 했습니다.
새 아버지는 그 어떤 일이건 간에 정말 열심히 하셨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하면 할수록 잘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가지고 있던 돈도 조금씩 잃어가면서 새로 시작된 가정도 불안하게 되었습니다.
가끔씩 술에 취해 오는 새 아버지는 어머니를 폭행하곤 했습니다. 저는 이젠 너무 지쳤는지, 그런 소리조차 싫어서 이어폰을 귀에 꼽았지만, 울음소리, 비명 지르는 소리, 욕하는 소리, 때리는 소리 이 모든 것이 이어폰 음악을 뚫고 들어와서 더욱 괴로웠던 것 같습니다.
며칠 뒤에 저는 여느때나 마찬가지로 거실에 있는 PC로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싸우는 소리가 들렸고, 전 굳이 신경쓰지 않으려 게임에 더욱 집중했으나, 어머니는 결국 방안에서 도망치고 제 옆에 앉아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새 아버지는 "여기서 이러지 말자" 라면서 다시 들어가자고 했지만, 따라 들어가봐야 좋은 꼴 보지 못했기에 어머니는 완강히 거부 하셨고, 결국 제 눈 앞에서 폭행을 자행 하셨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저는 그 광경이 엄청난 충격 이었기에 소리치며 바로 집에서 뛰쳐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 결국 새벽에 복귀 하였는데, 결국 저도 심하게 맞았습니다.
그 후에 새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이복동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다행히도 얼마동안에는 행복하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동생을 낳고, 당시 작은 구멍가게를 하던 저희 집에서, 허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애만 보겠다며 아무것도 안하는 새 아버지를 대신해서, 어머니와 저는 가게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중학생을 지나 어느새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 그런지 새 아버지와 다투는 상황이 정말 많았지만, 어린 동생 때문에라도 꾹꾹 누르며 견뎌냈고, 결국 대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었다고 한들 상황이 좋아지진 않았습니다.
수업시간, 쉬는시간, 개인시간 할 것도 없이 시도때도 없이 집에서 전화가 왔고, 가게 일을 도와야 했기에 평일엔 학교가 끝나면 일을 하였고, 주말엔 아침부터 가야만 했습니다. 대학에서 친구를 사귈 틈도 없이 일을 하는 것이 정말 싫었지만, 내가 가질 않으면 가게의 일이 오롯이 어머니의 몫이 되어 버렸기에, 가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얼마 뒤 군대에 입대를 하게 되었고, 군 특성상 연락을 하기가 어려웠는데, 100일 휴가를 나왔을 때 집으로 가기 전 어머니께 연락을 드렸으나, 이사를 간건진 모르겠으나 다른 주소를 알려 주셨습니다.
사람 한 명 살기 힘든 허름한 원룸에 얼굴에 상처가 많은 어머니와, 동생이 있었고, 어머니는 첫 휴가인 만큼 집으로 가고 싶었는데 갈 수가 없다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 후에 휴가를 나오게 될 때, 괜시리 어머니한테 부담 드리고 싶지 않아서 이야기 하지 않고, 친구 집이나 찜질방에 지내고 다시 부대복귀 하곤 했습니다.
전역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새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는 정리 되어 있었고, 동생은 결국 어머니가 키우는 것으로 결정 되었습니다. 그러고 집으로 갔는데, 또 다시 연세가 지긋한 새로운 아저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긋지긋 했습니다.
새로운 집에 새 아저씨는 저 보다 어린 딸이 하나 있으셨고, 그렇게 저희이는 다섯식구가 되었습니다. 이 집에 계속 살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아서, 대학교는 복학과 동시에 집을 나온 뒤 자취를 시작 했습니다. 많은 일과 아르바이트를 시작 하면서, 부족한 학비는 학자금 대출을 받으며 겨우 졸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어머니는 남은 돈 하나 없이 이혼 하셨고, 새 아저씨는 구두쇠 였기에, 어머니 용돈까지 드려야 하는 힘든 상황 이었습니다.
하는 일도 너무 많았고, 시간이 없어서 거의 본가엔 내려가질 못했는데, 추석에 쉴 수 있어 내려가보니, 새 아저씨와 그 딸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고, 다시 원룸으로 복귀한 어머니는 술에 찌들어 있었고, 중학생이었던 이복동생이 케어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어렸을 때 내 모습이 반복 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최대한 수습하고 상황정리를 하고 나서 다시 삶으로 돌아간 저는 바쁘게 살던 와중에 이복동생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엄마가 술을 많이 드셨는데 숨을 쉬지 않는다고, 119에 연락해서 신고 했다면서, 어쩔 수 없이 회사에 사정을 이야기 하고 내려가서 수습했고, 얼마 있다가 이복동생은 새 아버지가 데려가는 것으로 마무리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 친아버지와 연락이 닿았는데, 친아버지는 새어머니가 있었고, 두 딸이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쉬웠기에, 새어머니에게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친아버지댁에서 식사 초대를 해 주셨기에 기쁜 마음으로 갔었는데, 우연히 새어머니가 '여보, 어머니라는 소리 그만 하라고 하면 안될까? 소름 끼치는데.." 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식사도 하지 않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고, 연락도 받지 않은 채, 그렇게 다시 친아버지와 연락을 끊었습니다. 더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그렇게 남 들은 한 번이면 족할 부모님과 동생이 제 인생에서는 너무도 많이 스쳐 지나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가족사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도 오픈하지도 않았습니다. 여자친구에게도 말 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릴 때 부터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무수히 많은 폭력을 당했고, 복잡한 가정사를 보내면서 자라왔는데, 그 것들은 몸 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갉아먹으며 고통스럽기에 그 트라우마는 언제나 눈 앞에 틀어지는 비디오처럼 생생하게 재생 될 만큼 머리에 남아 있습니다. 악몽으로 나타날 때도 많기에 현재까지도 계속 진행중에 있습니다.
저도 이제 어느 덧 결혼 적령기가 되었는데, 우리집엔 돈이 하나도 없고, 저도 모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찌어찌 해서 하게 된다면 제 결혼식엔 어떤 아버지와, 어떤 어머니를 세워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혼에 대한 생각을 접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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