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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대에 들어서 세종에 대한 여러가지 말들이 생기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황희가 사직을 요청했으나 세종이 그를 부려먹기 위해 매번 거절하였다.'
'김종서가 세종의 업무를 감당하기 어려워 함길도로 파견되기를 요청했었다'
'정인지가 모친상을 당하자 세종이 상례법을 바꿔버려 정인지를 바로 복직시켜 일을 시킨다'
등등.. 과연 이런 이야기들이 100% 맞는 사실일지, 먼저 세종대왕과 그의 업적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이야기 해 봅시다.
세종 (재위 1418~1450) 조선 제 4대왕
태종의 3자(충녕대군)였으며 이름은 이도, 자는 원정, 어머니는 민경왕후 민씨이며 비는 심온의 딸 소헌왕후 입니다.
1408년 (태종8년)에 충녕군에 봉해지고, 1412년 충녕대군으로 진봉, 1418년 6월 왕세자에 책봉되고 같은 해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게 됩니다.
집현전을 통해 인재를 육성하고,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 제도정비와 과학, 농업, 의약기술, 음악, 법제, 공법, 국토의 확장까지, 왕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 모든 곳에 업적이 남아있습니다.
일일이 다 말하면 글이 엄청 길어지고 왠만한 건 다들 알거 같아서 그냥 다음 표로 요약해보고자 하고, 다음은 세종 재위기간동안 '주요' 편찬서 목록입니다..
어디까지나 '주요' 편찬이며, 여기에 없는 것도 훨씬 많습니다.
이렇게 인간적으로 너무 많은 일들을 했기 때문에 세종은 신하를 죽도록 부려먹었다는 이야기도 나올 수 밖에 없는데, 하지만 그 사실이 모두 100% 세종의 의도에 의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서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정인지가 모친상을 당하자 세종이 법을 바꿔서 3년상을 3개월로 바꾸고 정인지가 거절 상소를 했으나 강제로 복직을 시켰다'
세종이 정인지를 엄청 아낀 신하였던 건 확실하다고 생각하지만, 하지만 위의 가설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전부터 기복(起復)제도라는 것이 있었는데, 상례를 치루는 관리를 복상기간 중에 직무를 보게 하던 제도로, 중국 남북조시대에 처음 나왔고, 한반도에는 고려 성종때에 오복제 라는 이름으로 처음 시행되어서 내려오던 것이 있습니다.
이 기복제도의 적용을 받았던 조선시대 신하는 다음과 같습니다.
태조 - 남재
세종 - 황희, 김종서, 정인지 등
세조 - 최항, 허종
선조 - 김명원, 이덕형, 곽재우, 이순신 등
인조 - 구굉, 김상헌 등
이 제도의 시행 과정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조선시대 6조의 하나였던 예조에서 해당 건에 대한 사유를 왕에게 상주하고, 왕이 이를 윤허해서 승정원을 통해, 대간(삼사 사간원의 수장들)에게 서경(정책시행의 정당성과 부패를 판단하게 함)을 요청하게 됩니다.
대간에게서 적격자라는 답이 나오면 복직 명령서인 기복출의첩식(起復出依牒式) 을 발부하고 상례를 바로 중단하는 것이 아닌, 평시 업무를 보게 하고 귀가 시 상례를 갖출 수 있게 하였습니다.
자신이 효심이 지극해 3년상을 굳건히 해야겠다. 라고 말할 수도 없었는데(유교는 충>효였으니) 하지만 당시 유교사회의 보는 눈들이 있기에, 왕에게 거절하는 상소문을 두세번 올리는게 관례였을 것 입니다.
조선은 유교적 이상을 추구하던 국가여서, 상례에 대해 엄청 중요시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부모(삼부팔모 포함) 상이 생기면 사직하고 본인 고향으로 돌아가 의례에 맞게 삼년에서 짧게는 3개월이라도 상을 치뤄야 했습니다.
물론 그 기간 동안 다른사람이 자기의 자리를 차지해 버릴 수도 있기도 하고, 일을 오래 쉬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오래 쉬게되면 업무감각도 쭉쭉 내려가서 사실상 당시 관료들은 이 상례를 좋아하지만은 않았을 것 입니다.
물론 좋아하지 않는다 해서 하지 않을 수는 없는데, 안하게 될 때에 그 여파는 유교사회에서 매장당하는 건 당연했을 것 입니다.
정인지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삼년상을 치루어도 충분히 복직은 가능했겠지만, 세종이 그것조차 원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을 걸로 추측은 되는데, 그럼에도 법을 바꿔서 정인지를 다시 불러들였다 라는 내용은 알맞지 않은 것 입니다.
조선의 상례에 대해 잠깐 알아보자면, 자신의 친부, 친모 외 조선에서는 삼부팔모에 대한 상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삼부
동거계부 : 어려서 어머니가 개가했을 때 어머니를 따라 계부의 집에 들어가 그 계부가 죽을 때까지 같이 살면서 양육의 은혜를 입은 경우
부동거계부 : 어려서 어머니가 개가할 때 함께 따라가 장성하였으나 분가한 뒤 헤어져 살게 된 계부 , 3개월상
원부동거계부 : 어머니가 개가할 때 함께 따라가지 않았고 양육의 은공도 없는 계부
팔모
적모 : 아버지의 정실부인. 3년상
계모 : 아버지의 후처. 3년상
양모 : 양어머니. 3년상
자모 : 서자로 태어나 다른 아버지의 첩들 가운데 자신을 길러준 사람. 3년상
가모 : 아버지가 죽은 뒤 재가한 어머니. 3년상
출모 : 잘못을 저질러 쫓겨난 어머니. 주자가례 이전에는 상을 치루지 않음
서모 : 아버지의 첩, 그리고 어머니가 죽은 뒤 아버지가 정실로 맞이하지 않은 부인. 3개월상
어릴 때부터 자기를 사랑하여 젖을 먹이거나 양육한 은혜가 있는 사람. 5개월상
유모 : 자기에게 젖을 먹여 키워준 사람 3개월상
자기 아버지가 여자를 엄청 좋아하면, 조선의 중앙직에 오래도록 눌러앉기가 힘들었을 것 입니다.
황희가 나이가 많아 사직하려 했으나 세종이 황희를 끝까지 부려먹기 위해 거절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세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있습니다.
1431년 황희가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자 거절하였다.
1432년 황희가 고령을 사유로 사직하려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435년 황희가 사직하기를 청하니 허락하지않았다
1436년 황희가 사직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1438년 황희가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439년 황희가 연로함을 이유로 해면을 청하나 듣지 않으셨다
1443년 황희가 노환을 이유로 걷기가 힘들다며 사직을 요청하자 가마와 지팡이를 주셨다.
이대로만 보면 세종이 자신이 죽으면서까지 황희를 부려먹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입니다. 특히 1443년에 걷기 힘들다고 까지 했는데 지팡이 짚고 일하라는 부분이 더욱 돋보이게 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아주 오랜 예전부터 있던 일인데, 통일신라시대부터 70세 이상의 연로한 대신들에게 '궤장' 이라는 하사품을 내렸는데, 김유신이 664년에 처음으로 받은것을 시작으로, 고려 강감찬, 최충, 최충헌등이 받았고, 조선 전기에는 황희 이외에 매우 드물지만 후기에는 이경석, 이원익, 권대운, 허목, 남공철, 김사목, 민치구 등이 받기도 했습니다.
(궤장을 하사하면서 큰 잔치를 베풀었기 때문에, 이를 받은 사람은 가문의 엄청난 영광으로 여겼다고 한다.)
조선시대는 1품 이상의 정승, 70세 이상이 대상이고 국가의 크고 작은 일 때문에 퇴직시킬 수 없는 자를 예조에서 왕에게 보고하여, 궤장을 내렸다고 합니다. (경국대전, 국조오례의 내용)
건강했던 조선의 삼정승(영,좌,우)은 진짜 그냥 아무나 정치 잘해서 올라갈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으며, 지방 수령부터 절제사, 절도사, 관찰사, 삼사, 6조 등 여러 부서에서 수십년 간 업무를 쌓아온 초 엘리트들이 올라가는 자리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삼정승 정도 되는 소수 엘리트들을 양성하는건 매우 힘든 일이니까, 죽을때까지 갈아서 써먹어야 되는 것이 조선의 관료체계 입니다.
후기 붕당정치와 세도정치 대에 들어서는 많이 퇴색되지만, 마냥 놀고 먹고 아첨만 떨어서 올라가는 자리는 아니었음은 확실합니다.
게다가 지금도 나이가 찼다고 해서 퇴직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이 별로 없듯이. 당시에도 그랬을 것 입니다.
그럼 황희는 왜 사직상소를 올린 것인가, 관직의 수는 제한되어 있고, 그 자리에 오르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상소와 거절을 반복한 거였다고 생각합니다.
황희는 "내가 사직하고 싶어도 왕께서 윤허하지 않으신다." 라는 명분을 얻고자 함이 큰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상소문을 올리지 않으면, 삼사부터 다른 신료들이 가만히 있었을까.. 싶습니다.
세종이 황희와 정치를 계속 하고 싶었던건 맞겠지만, 황희가 죽기전까지 일을 했던 건, 세종의 의도가 100%는 아닐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맥락으로 병조판서 조말생 또한 23년간 꾸준히 사직상소를 세종에게 올리지만 거절하는데, 이는 조선 관료제의 딜레마를 세종이 타파하기 위한 흔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 관료제는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로테이션을 돌리는 제도였는데, 이는 반대로 그 분야의 전문가가 육성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특히나 군사관련 업무는 훈련부터 축성까지 장기계획이 필요한데, 매번 병권이 바뀌게 되니까 효율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연유로 세종은 태종때부터 병부에 있던 조말생을 8년간 계속 병판으로 기용해 전문화를 시키기 위해 사직상소를 거절하는것을 반복해서 유지했던거고, 여러 사건들이 있었지만 병권쪽에 계속 일을 맡겼고, 조말생은 이를 절대로 싫어하지는 않았을 것 입니다.
김종서가 세종이 일을 너무나 시켜서 지방으로 도망가기 위해 여진정벌에 자진했다는 이야기는 이건 정말 말도 안되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세종이 일을 너무나 시키는 건 어느정도 맞는 이야기지만 지방관직의 일들은 김종서 자신에게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을 것 입니다.
지방감찰, 사법권시행부터 특히나 당시 함길도는 여진의 침략이 잦았던 지역이니 국방문제까지, 이런 걸 지방 향리에게 조금이라도 위임하면, 향리가 또 수령이나 관찰사를 쉽게 보게 되는 역전현상도 생기게 됩니다.
그렇기에 업무량이나 업무강도가 중앙관직에 비해 전혀 낮지 않았을거고, 게다가 왕과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한번의 실수가 파직으로 치닫는 오해도 생길 소지가 많아 스트레스가 심한 관직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김종서가 가기 싫은데, 세종이 너밖에 없다며 등을 떠밀었을 가능성이 더 높았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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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김종서는 우리가 장군이라고 부르지만 지극히 문관 출신이며, 국방지역으로 파견되는 건 더더욱 부담이었을 것인데, 생각 이상으로 엄청 잘했다는 평가 입니다.
세종은 생전에 백성을 위해서 정말 많은 노력을 했고, 그에 더불어 자기 휘하의 신하들을 잘 써먹고, 부려먹기도 했습니다.
위에 서술한 세가지 이야기들이 웃자고 하는 얘기인것도 알고, 해석도 자유지만, 부분적인 사실들로 인해 아예 왜곡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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