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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에 따른 숙청은 프랑스 혁명기의 공포정치에 비유되며, 당시의 잔혹성은 전시의 적에 의한 것만큼이나 과도했던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러한 한 사례로서 부역자인 남편이 살해되고, 이어 부인이 강간당한 채 자신의 11살된 아들과 함께 살해 되기도 합니다. 묶인 사람이 자신의 딸이 12번이나 윤간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또 다른 경우 아이는 내팽개쳐진 채 그 어머니가 강간당할때고 있고, 고문이 처단 직전에 따랐습니다. 부역 혐의자의 눈을 찌르고, 생식기가 잘리고, 불타는 침대 위에 눕혀졌습니다.

 

한 신부는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파야 했고, 생식기를 총격한 뒤 생매장 되었습니다. 여성들의 경우 가슴이 도려내졌습니다. 부역자들은 맨발로 깨진 유리 위를 걸어야 했고, 여성 부역자는 체포자에게 봉사하기 위해 나체가 되었으며, 동물과 같이 교미하여야 했습니다.

독일군이 떠나면서 이제 레지스탕스들이 세운 비정규 재판소들이 민병대의 그것을 대체하였습니다. 치안판사나 변호사는 없었고, 부역자들이 끌려와 간단히 신문을 받은 후 곧 처형되었습니다.

 

재판의 심리에 관한 어떠한 기록도, 심지어 피고인들의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나치군이나 민병대가 약식처형을 실시하던 감옥도 이러한 임시재판소로 사용되었습니다.

 

리용에서만 그당시 14,311명이 체포되고 4,342명이 살해되고 290명의 여성이 강간당했습니다. 범죄는 다시 범죄로, 학살은 다시 학살로 이어졌던 것이며, 이 가운데 흑백이 가려지지 못한 채 억울한 처형을 당한 사람이 적지 않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겠지요.

이와같이 사실상 재판없이 이루어진 약식처형에 관하여는 아무런 공식 기록이 없을 뿐만아니라 그 숫자에 관하여 여러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해방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틱시에는 정보 책임자였던 파씨 대령에게 1944년 말과 1945년 초에 이르기까지 약식처형된 자가 약 105,000명에 이른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어떤 학자는 레지스탕스에 의해 1백만명이 체포되고 그 가운데 재판없이 처형된 사람은 12만명에 이른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전 후 이 숫자는 여러 저작 또는 보고에서 정설로 되었습니다. 

이 자료들에 따르면 부인들이 자신들의 남편의 정부를 부역자로 몰거나 해방의 기회에 약탈 또는 살해 등으로 날뛴 범죄자들 또는 법정에서 괴롭힌 변호사들을 보복적으로 부역자로 몰아 처단한 경찰관들의 이야기까지 나옵니다.

 

또한 독일 점령자들을 위해 매춘부로 일한 여성들이 부역자로 처단당한 이야기가 끝없이 있었습니다. 정치적 동기에 의한 살인도 있었고,  리비에라의 셍 막심이라는 마을에서는 공산주의자 레지스탕스가 비공산주의자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16명이나 죽인 사례도 발견되었습니다.

유죄 판결은 공정하지 못했습니다. 재판소의 심급에 따라, 사회적 신분에 따라(대기업 간부나 사장들은 신문기자들에 비해 유죄 판결을 피할 수 있었는데, 이들의 행적이 덜 공개적이었고, 특히 경제 재가동 논리로 그들의 협조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기 때문), 시기에 따라(1945년 이후의 판결은 그 이전보다 덜 가혹하기도 함) 다양했기 때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탄생한 수백 개의 단체들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겪은 고통에 진정한 등급을 매기는 작업을 했습니다. 레지스탕스 자원부대들은 '인종적' 이유로 강제수용되었던 사람들과 혼돈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후자들은 '전쟁포로들'과 구분되기를 원했으며, 포로들은 '징용노동자들'과 차별되기를 바랐습니다. 

1953년에는 갱구앵(Guingouin) 사건이 발생는데, 갱구앵은 프랑스 국내군 리모주 사령관 출신이면서 지하 공산당 조직의 전설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리무쟁의 티토'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이 레지스탕스 지도자가 1953년 12월 24일 체포된 것입니다.. 그는 1954년 6월까지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이때 간수들로부터 모욕적인 대우를 받았고 한 차례 그를 암살하려는 시도까지 있었습니다.

 

코레즈 농민들에 대한 살해교사죄로 고소당한 그는 일부 농민들의 엄청난 증오의 대상이었고, 이들은 1944년 8월 갱구앵이 리모주에 설치했던 군사재판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갱구앵이 책임자였던 제5지방 군사재판소에서 약 40명이 처형되었습니다.

페탱주의의 부흥은 1951년에 그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이 해 6월 총선에서 독립공화연합(UNIR)은 28만 8,089표를 획득했는데, 이 정당은 페탱 원수의 변호사였던 이조르니와 오데트 모로에 의해 창당되었습니다.

 

독립공화연합은 페탱의 사상을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3명의 후보를 당선시켰습니다. 한편 피에르 라발 정부의 농업장관 출신인 자크 르 루아 라뒤리도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의원에 당선되기도 합니다. 

1958년 4월 20일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스캔들이 터졌습니다. 작가 폴 모랑이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선출 선거에 입후보한다는 공고가 나오자 생존해있던 레지스탕스 대원들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독일 점령기에 독일 선전부는 모랑의 글이 점령 세력에 대해 '대단히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판단했고, 직업 외교관인 모랑은 1943년 비시 정부의 주헝가리 대사를 역임했으며, 1944년에는 스위스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 자르댕과 공모하여 스위스 대사가 되었습니다.

 

모랑은 보안대 기관지이자 대독 협력파 신문인 <콩바>에 글을 기고하기도 합니다. 

해방이 되자 그는 대사에서 해임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53년 최고행정재판소는 위의 결정을 취소했고, 2년 뒤 모랑은 복직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쳤음에도 그는 자신의 독일 편향을 한 번도 부정한 적이 없었습니다. 1951년 <세비야의 고향자>에서 나폴레옹 군대에 점령당한 스페인을 묘사하면서 대독 점령을 정당화했고 레지스탕스를 비웃기까지 합니다.

 

이상의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모랑이 아카데미 정회원 선출에 입후보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겠지만, 실은 해방 이후 아카데미는 존경스러운 페탱주의자들의 온실이 되어 있었습니다. 

 

- 이상 앙리 루소의 '비시 신드롬'에서


낙관주의를 지향했던 유럽사회가 전쟁을 겪으면서 회의주의에 빠져들었고, 늙은 아버지는 젊은 아들의 장례식을 치르고, 젊은 아버지는 아내와 어린 자식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브라지약의 아버지 역시 모로코 식민지 군대 장교로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다 세상을 떠났기에 그도 전형적인 '잃어버린 세대'의 가정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미 그는 1937년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 전당대회를 보고 나서 모라스주의에서 열렬한 파시스트로 전향하였습니다. 

 

독일 여행을 통해 히틀러와 그의 군행렬을 직접 보고 온 브라지약은 <르뷔 유니베르셸>이라는 잡지에 '히틀러와의 100시간 - 뉘른베르크 회의'라는 기사를 쓴다. 그는 독일 여행을 통해 살아 숨쉬는 젊은 독일에 매력을 느꼈으며, 괴테, 베토벤 등 조국애를 공감하는 독일인들과의 만남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서술했습니다. 

 

꽃으로 장식되어 있던 종래의 발코니 풍경이 아니라 각 건물마다 높이 걸려 있는 나치 깃발이 그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또한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환호하며 소리 지르는 민중의 모습을 보고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잃어버린 세대가 아닌 새로운 세대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반유대주의는 나치 독일과 비시 정부 사이에서도 주요 정책이었습니다. 1942년 6월과 7월 비시 정부는 점령과 자유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검거를 명령했습니다.

 

1942년 11월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완전히 점령하면서 본격적인 유대인 학살 정책이 자행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프랑스 전역에 나치 독일의 수탈 정책이 시작되었고 동시에 유대인에 대한 인종 말살 정책이 실행됩니다.

 

이 과정에서 4살 정도의 유아들마저 아우슈비츠로 보내져 학살당하는 비인도적 행위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브라지약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비록 그가 유대인 집단을 격리해야 하며 그 자손들의 번성을 막아야 한다는 글을 썼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가히 충격적이었던 것입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프랑 시민 유대인들과 그 자손까지도 학살되는 상황 아래서 브라지약은 스스로 자신의 환상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유대인들은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세대이며 함께 조국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떨어져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브라지약은 6살에 아버지를 잃었던 자신의 모습을 상기했을 것인데, 점차 자신의 몽상이 무너짐을 깨달았는지 1943년 여름, <파시즘의 대장례식>이라는 기사를 쓰고 나서, 그는 나치 선전의 전유물이 된 <쥐시 파르투>를 떠났습니다.

 

그 이후, 협력 문인인 드리외와 함께 <민족 혁명>이라는 잡지를 운영하기도 했지만 점차 언론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해방 후 브라지약은 피신해 있다가 자신의 어머니가 체포되는 바람에 자진해서 경찰서로 가게 되었고, 1945년 1월 19일 재판을 통해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아래와 같이 반유대주의와 협력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피력했습니다. 

나는 인종에 대한 집단 폭력을 결코 찬성한 적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가족 그리고 자녀의 어머니를 떼어놓는 일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에 반대하여 독일이 행한 폭력적 행위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나의 반유대주의 사상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유대인 문제는 근대 국가와 서유럽 국가에서 현실적인 문제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다른 나라에서 흑인에 반대해 저지른 폭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폭력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재판관은 내게 글을 쓴 것을 후회하는지 물었습니다. 후회한다고 대답한다면, 내가 한 모든 행동은 내 목숨을 구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될 것이며, 그들은 정당한 권리로 나를 경멸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상황이나 사람들에 대해 잘못 생각할 수 있엇으나 내 행동에 대한 동기는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브라지약의 사형 선고 소식에 그의 지인들, 파리고등사범학교 동창들, 몇몇의 지식인들이 사면운동을 벌였습니다. 이념적으로 대립적인 위치에 있는 사르트르, 카뮈와 같은 인물들도 참여할 정도로 브라지약의 문학적 재능은 당대의 지식인 사이에서 인정받기도 합니다.

 

처형을 3일 남겨두고 그는 동료 문인들에게 사면운동에 대한 감사 인사와 더불어 자신의 행동에 대한 변을 다음과 같이 남겼습니다. 

저를 사면시키기 위해 서명해주었던 프랑스 지식인, 문인, 예술인, 음악가, 대학의 관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제가 갚아야 할 빚이 너무 크지만, 서명 리스트를 통해 인간이 가지는 가장 훌륭한 특성을 (무엇인지) 보여 주었습니다.

 

그 리스트에 계신 분들 가운데는 작품이나 (정치) 활동에서 저와는 매우 거리가 멀어서 저에게 무관심해도 될 분들까지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서로 모르지만 저는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몇몇 분들에 대해... 저는 그들의 지지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들은 프랑스 문인들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아량을 베풀었습니다... (비록) 조국이 겪은 비극적인 상황에서 제 생각이 충격적이었겠지만, 제가 저지른 모든 오류가 결코 조국을 훼손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며, 좋은 나쁘든 간에 조국을 끊임없이 사랑했다는 것만큼은 확신합니다. 하여간 온갖 대립과 난관을 넘어서서 프랑스 지식인들은 저를 가장 영예롭게 해주었습니다. 

(*프랑스 지식인들의 사면운동에도 불구하고 젊은 천재로 통했던 작가이자 언론인인 로베르 브라지야크는 끝내 35세의 나이로 처형됨)

- 이상 박지현의 '비시 프랑스, 잃어버린 역사는 없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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