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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악마를 처음 만났던 건, 17살쯤 됐을 때였고 그놈이 제 목숨을 구했습니다.
근로학생 알바 끝나고 집에 가려고 버스정거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우산을 안 가져온 날 이었습니다.
늘 그렇듯이 우산 안 가져온 날엔 꼭 비가 오곤 하지요.. 그 날도 장대비가 엄청나게 쏟아져서 거의 발목까지 물이 찰 정도로 많이 오던 날이 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비가 딱 제 머리 위에만 멈추더군요... 너무 놀라 위를 올려다봤더니, 거기에 그 놈이 있었습니다. 그놈이 제 머리 위에서 우산을 씌워주고 있었던 것 입니다.
그놈은 도대체 인간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 말만 듣고 빚어서 만든 몰골을 하고 있었는데, 최소 2m는 될법한 키를 해가지고선 비쩍 말라 비틀어진 몸매에 구부정한 어깨가 무슨 독수리같은 꼴이었습니다.
얼굴은 또 살점이라곤 없었고, 뼈만 앙상해서는 살이 있어야 할 곳은 죄다 푹 꺼진 와중에 정말 친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뻐드러진 회색 이가 다 보이도록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자네 이야기 못 들었나?"
"뭘?"
"오늘은 버스 운행을 안 한다네. 운전사가 이 날씨에 음주운전하다 꼬라박았거든. 승객은 전원 사망했고."
명랑하다시피한 어조로 말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속이 다 뒤집힐 것 같았습니다.
그 놈 말을 믿을지 말지를 떠나서 당장 이 자리를 뜨고 싶었고, 최대한 멀어져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어....그럼 오늘은 걸어가야겠네."
"그래, 그러는 게 좋을 걸세.. 자, 여기 우산 가져가게나."
그리고선 쓰고 있던 우산을 제게 넘겨주었는데, 아무 생각도 없이 우산을 받아들었고 손끝이 스쳤는데, 스쳤을 뿐인데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렇게, 다음날 아침 뉴스에서 버스 전복사고가 났다는 사실을 보았고, 그런데 제가 타려던 정거장 바로 다음에 사고가 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놈 말대로 승객 전원 사망이라고 했고, 만약 그놈 말을 무시하고 그 버스를 탔다면 저 역시도 죽었을 것 입니다.
그 다음으로 악마를 봤던 건 제가 대학교 2학년일 때인데, 제 기숙사 방에서 수그리고 앉아 아무렇게나 뒤져서 꺼낸 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왔구나."
"그래, 내가 왔다네."
당연하듯이 지껄이면서, 그리고는 책을 덮고 제게 또 환하게 미소를 지었는데, 그 놈의 거지같은 회색 뻐드렁니가 가득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오늘은 선물을 가져왔다네."
그때처럼 또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 그래?"
"아주 좋아할걸세."
그러고는 재킷 속주머니로 손을 뻗더니 핑크색 스프링제본 노트를 꺼냈고, 표지에는 가지런한 글씨로 "엘렌 하트웰"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심리학 수업 같이 듣는 예쁘장한 갈색 머리 아가씨 거라네."
"자네 맨날 그 아가씨를 쳐다만 보지 않았나. 이거 두고 가지 않았냐고 하고선 저녁약속을 잡아보게."
그러고는 책상에 노트를 얌전히 올려 두더군요.
"어....고마워."
"감사는 넣어두게나. 다음에 또 다시 봄세."
그리고 눈 깜박할 새에 소리 하나 안 내고 사라져버렸습니다. 그 이후 마지막으로 악마를 본 건 아들을 가졌던 날 입니다.
이런저런 일을 겪고서 엘렌은 내 부인이 됐고, 저는 후딱 씻고 나가서 아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빨리 닦고 나갈 마음으로 샤워부스를 나오자마자 그놈이 서 있었는데, 하필이면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꼴이었습니다.
"잘 지냈나? 나일세."
"깜짝 놀랐어."
"아 뭐 그럴만도 하지. 그건 그렇고, 자네 잘 듣게나. 오늘 자네는 아버지가 될거야. 아들일 걸세, 아내는 본인 몸 상태를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오늘이 바로 그 날이란 말일세."
내가 아버지가 된다....생각만 해도 설레는 일이었지만 이 놈 꼴을 보고 있자니 또 다시 속이 불편하기 시작했습니다.
"근데 도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거야?"
내내 궁금했던 걸 물어봤는데... 그 놈은 그저 입이 찢어져라 웃기만 했습니다.
"아, 운명이란 게 어떻게 흘러갈 지 모르는 거 아닌가. 자네 눈에는 안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손가락을 튕기더니 회청색 연기만 남기고선 사라져버렸습니다.
그 뒤로 다시는 그 놈을 보지 못했지만 이따금 불현듯 그 놈이 한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몇년 지나고, 수십년 지나고 나니 점점 잊게 되었습니다.
물론 경찰이 제 집 문짝을 찢어발기며 들이닥치기 전까진 말입니다.
그 들은 경찰견 수십마리와 온갖 굴삭장비를 대동해 들어오더니 제 집 안팎을 송두리째 들었다 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여성의 유해 37구를 발견했다면서 제 하나뿐인 아들을 체포했습니다.
재판 내내 아들은 "악마의 사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일관되게 주장했지만, 당연하게도 검사 측에선 그 말을 믿어주질 않았습니다.
마침내 제 아들은 사형을 구형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내 아들은 거짓말쟁이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수백 수천개의 연습장 페이지에 똑같이 그려진 얼굴이 증명하고 있었으니....
살점이라곤 없고 뼈만 앙상해서는 살이 있어야 할 곳은 죄다 푹 꺼진 와중에 정말 친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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