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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려는 모든 시도는 항상 지옥을 만들어낸다"
다른 좋은 고전들도 많았지만 굳이 이 책을 선택했던 이유는, 그다지 대단치는 않은데, 정치학 개론 시간에 스치듯이 읽고 넘어갔던 저 문장이 뇌리에 깊게 박혔기 때문이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널리 알려진 비슷한 문구로 이런 것도 있습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간단하게 소개하면, 이 책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타국으로 떠난 유대인 철학자 칼 포퍼의 일대의 역작입니다. 칼 포퍼는 토마스 쿤과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과학철학자 중 한 명이지만, 그의 사회과학적 통찰력 역시 뛰어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대표적 저서인 <역사의 빈곤>과 함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당시 전세계에 만연해있던 전체주의의 사상적 기원을 밝히고, 전체주의가 가지는 폭력성을 경고하는 책입니다.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과 마찬가지로 전체주의의 위험성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지만, 아렌트와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고, 보다 간결하면서 비교적 직관적인 설명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보다 수월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앞선 책들에 대해서 비교적 수월하게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며, 플라톤-루소-헤겔-마르크스로 이어지는 서구 철학의 지성사에 대한 개괄적인 흐름에 대해 어느정도 지식이 있어야 그가 무엇을, 어떻게 비판하고자 하는지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의 메세지가 분명하고, 일관되며, 그러한 메세지를 중심으로 앞선 철학자들의 주장들을 하나하나 까부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심오한 지식 없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교적 수월하다는 의미 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 매료되었던 이유는, 트로츠키, 게바라와 같은 낭만적 혁명주의에 심적으로 깊이 매료되어 있던 시기였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이고, 지금 시대에 존재하는 악(당시의 기준으로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비인간적 논리)을 극복할 수 있다면 이상적인 사회에 도달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던 시기였다는게 두번째 이유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당시 내 세계관의 정오를 떠나서, 포퍼의 논리가 이후의 내 사고 방식을 송두리째 뒤엎어 놓았다는 것은 분명할 것 입니다.
적어도 지금의 나를 형성함에 있어서 굉장한 자극을 준 책이었음에는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동안은 이 책이 내 책장에서 다시 나올 일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경험하고, 그에 대한 처절한 반성이 이루어진 21세기에 전체주의라니,.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가 가능한가를 물었던 아도르노의 물음처럼, 그만한 인류사의 충격으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전체주의를 경계하게 되었고, 그러한 결과로 어느정도는 형해화되고 파편화된 사회 속에서 살게 되었지만, 더 이상 인간의 역사에서 전체주의는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이 책은 반 세기 전 인간의 무지와 추악함을 철저하게 기록하고 분석한 책,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고전으로서의 의미밖에 없는 지나간 역사의 한 단면을 기록한 책 정도로 여겼었고, 그것이 불과 얼마전까지의 이 책에 대한 나의 평가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내용이 떠오르고, 책장 구석에서 먼지가 쌓여 있는 이 책을 오랜만에 꺼내들었을 때, 그 심정은 씁쓸함이라는 표현, 그 이상이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이 그저 과거 역사에 기록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어쩌면 지금 시점을 포함한 인류사 전체에서 그대로 통용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왜 20세기 중반에 쓰여진 이 책이 그 시작을 수천년 전의 플라톤으로 잡았는지, 단지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루소와 헤겔,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그 '특유의 사고방식'을 통시적으로 고찰하였는지를 감히 추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성과 감성의 대립이 철학사에서의 오랜 탐구 주제였던것과 마찬가지로, 개인과 집단의 갈등은 고도로 조직화된 인간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대립이자 논쟁거리였을 것입니다.
사실 사회과학의 근본적인 주제가 개인의 자유와 집단의 안정성일지도 모르는데, 따지고 보면 경제학에서 고전주의니 케인지언이니 따지는 것도, 시장이 우선이니 정부가 우선이니 따지는 것도 다 같은 맥락 아니던가? 하이에크와 노직이 자유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면, 드워킨과 샌델은 해묵은(어쩌면 그렇게 보였던) 공동체주의를 새롭게 다듬어 가져와 또 다른 논쟁구도를 펼치지 않았나? 오늘날 고도로 분화되고 발전한 사회과학이지만, 결국 그 모든 개념과 이론과 가설들이 마주하게 될 원류 중 하나는 이것일 것 입니다.
나냐, 우리냐
우리는 작은 공동체에서부터 거대한 국가 담론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러한 질문을 묻게되고, 또 답해야 한다. 사회과학이 그렇듯 그 어디에도 정답은 없고, 그때 그때 적합한 해답이 있을 뿐입니다.
물론 포퍼의 이 책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논하고는 있으나 이것이 핵심은 아니다. 후술하겠지만 파시즘이라는 그 무지막지한 사고체계가 얼마나 단순한 선의에 기초할 수 있는지를 경고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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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이 책은 20세기 민족주의 광풍에 기반한 파시즘에 한정해서 읽을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러한 사고 방식을 이해하고 경계하기 위하여 충분히 유의미한 책이라 감히 평한다. 파시즘은 멀리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 한발자국만 넘어간다면 언제든 우리가 그토록 무서워했던 바로 그 영역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간결하고 명료합니다.
역사는 단선적이지 않고, 역사는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지향점을 가진 역사관을 경계해야 합니다.
판단 기준은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 즉 가설이 반박 가능한가의 여부. 이를 단순하게, 혹은 과격하게 축약하면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성을 통해 반박이 가능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발전 가능하다면 그것이 참된 논리입니다.
포퍼의 이 책은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 단선적인 역사 발전관, 지배자로서의 철인의 존재 등 일부 '진보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특유의 사고방식이 가지는 폭력성에 대해서 누구보다 신랄하게 고발합니다.
역사에 종착지가 존재하는 순간,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순간, 이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하지 않은 나머지 것들은 철저하게 주변화되고,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에 대한 해석을 독점하고, 선악의 판단 기준이 명확하며, 특정의 가치가 다른 가치에 '늘' 우선할 때, 우리는 자유주의의 몰락을 목도하게 됩니다.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려는 모든 시도는 항상 지옥을 만들어낸다"
오늘날 현대적 의미의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자유주의에 기반하며, 애초에 자유주의 없이 민주주의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자유주의에 대한 막연한 적대감과 함께 민주주의가 형편없이 몰락하는 모습들을 보고 있습니다. 트럼프의 당선과 브렉시트는 그러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몰락하는 상징으로 여겨지곤 하나, 그러한 민주주의의 후퇴는 그다지 멀리있지 않습니다.
굳이 정치 단위까지 올라가지 않더라도 바로 곁에서, 일상에서 언제든 횡행할 수 있는 폭력성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는 지난 역사를 통해서 이를 너무나도 잘 경험해왔습니다.
권위주의나 전체주의적 행태나 모두 민주주의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극도로 경계해야 하는 양태이나, 대중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더욱 더 경계해야 할 것은 극단적인 통일성을 요구하는 전체주의라 생각합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시작된 권위주의-전체주의적 정권의 몰락은 이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미래는 오웰의 빅브라더가 아니라 헉슬리의 신세계임을 암시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확산과 기술의 발달은 외려 빅브라더를 재 소환 했습니다. 아이 웨이웨이의 이 그림은 오늘날의 현대사회는 권력을 독점한 누군가가 나머지 모두를 감시하는 파놉티콘이 아니라 모두가 모두를 감시하는, 서로가 서로에게 빅브라더가 되는, 극단적인 감시사회가 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이와 유사하면서 조금 구성이 다른 그림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 구성이 가장 오늘날 감시사회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황금색 CCTV와 트위터, 수갑, 누군가는 안을 감시하지만 동시에 누군가는 또 그들을 감시하는 구조. 현대사회의 모습을 얼마나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는지.. 엠마 왓슨이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 <서클>에도 이와 유사한 장면들이 연출됩니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감시 사회 속에서 모두가 하나의 생각, 하나의 잣대, 하나의 도덕적 기준만을 강요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들이 악의를 가지고 이를 행하는 것은 아니라, 자신의 행동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리라는 그 선의에 기초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이야기가 잠시 샜지만, 포퍼의 모든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증가능성에 기초한 그의 세계관이 보수적이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어떠한 지향점을 제시해주지도 않으며, 힘(권력이든, 금력이든)에 기초한 현실의 입장에서 그러한 '이상주의적' 태도가 가당키나 하냐는 비판은 그의 논리적 한계를 드러냅니다.
포퍼의 한계에 대해서 반박할 마음은 없고, 애초에 포퍼의 입장을 옹호하고자 쓴 글도 아닐 뿐더러, 그의 입장을 무작정 추앙하는 것은 그가 두 권의 책을 통해서 비판하고자 했던 '닫힌 사회'를 그대로 재현하고자 하는 꼴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포퍼의 글은 여전히 유의미합니다.
누군가는 인정하지 못하겠지만, 오늘날 보이는 정치행태가 나치즘의 그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나아가 낙인찍기 혹은 labeling 이라 불리는 모습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정치와 일상을 가리지 않고 만연하기에, 자유주의에 내재하는 기본적 가치에 대한 몰지각한 이해를 쉽게 볼 수 있는 작금의 모습은 포퍼의 책을 신간으로 소개하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상황입니.
선의(good faith)는 선한 결과(good result)를 담보하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문화대혁명도 활기차고 아름다운 공산 중국을 건설하기 위한 목표에서 이루어졌을지도 모릅니다. 크메르 루주도, 구유고 사태도, 어쩌면 나치의 만행들도 이를 묵인하고 참여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상향을 건설하기 위한 선의에 기초했을 것이며, 심지어 이를 입안하고 계획한 지도자들조차도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고,. 천국과 지옥은 동전 양면과 같으며, 천국은 지옥의 토대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즉, 누군가의 유토피아는 다른 누군가의 디스토피아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플라톤의 이상향, 루소의 인민 민주주의, 헤겔의 선형적 역사관, 마르크스의 낭만적 혁명관에 대한 모든 개인적인 반감이 쏟아져서 포퍼에 대한 맞지도 않는 수식어로 설명하는지도 모릅니다.
철학에 대한 짧은 가방끈으로 이들에 대한 철저한 오해를 하고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오늘날 일련의 사태에 대해 괴이함을 느꼈더라면, 포퍼의 글이 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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