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명보에게 '영원한 리베로'라는 별명을 붙여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이 벌써 22년 전, 그해 여름이 지나 태어나 2002년 뜨거웠던 기억이 없는 못한 아이들도 지금 편의점에서 술, 담배를 살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 누군가는 군에 입대해 나라를 지키고 있고, 누군가는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에 열중이며, 누군가는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이렇게나 시간이 흐른 지금 10년 전 사라졌어야 할 홍명보의 이름이 다시 대표팀에 등장했고, 이번에는 대한축구협회가 잘 아는 사람이라 감독에 올랐다고 합니다. 아는 사람만 아는 사실, 홍명보의 이러한 작태는 처음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물어볼 수 있겠지만, 2012 런던 올림픽 동메달, 대단한 성과 아니냐고.. 물론 맞는 말이지만..

올해 2월 즈음, 본인이 처음 후보로 거론되는 시점부터, 강력하게 대표팀 감독으로 가길 원했으나, 팬들의 반응이 좋지 않아서 이를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최종 후보자였던 제시 마치와 대표팀간 계약이 결렬되며, 다시 본인이 후보로 거론되자 굉장히 기뻐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정해성 위원장과 전강위가 국대 감독 최종 후보자로 추천하겠으니, 감독직을 맡아달라는 6월 달 제의를 이미 구두로 승락하였습니다. 축구계와 울산 선수단에 홍명보가 대표팀 감독으로 간다는 소문이, 6월 초부터 파다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 입니다. 그러나 이후 정몽규 회장이 홍명보는 이미 월드컵에서 실패한 감독이고, 지도력 또한 의심된다며 선정을 최종 거절하자 이에 극대노 하게 됩니다. 근래 협회와 정몽규를 저격하고 맹비난했던..

월드컵 직전 토지 매입 4월부터 본인이 직접 여러 차례 근처의 부동산을 찾았고, 최종 계약일은 월드컵 엔트리가 발표된 이후인 5월 15일이라고 전했습니다. 그 당시 홍명보 감독을 봤던 부동산 중개인이 '지금 이 시간에 이렇게 땅만 보러다녀도 괜찮냐?'라고 했을정도 였습니다.홍명보 감독은, 이후 월드컵 훈련 기간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 시간에 진행했던 일이고, 계약은 대리인이 가서 했다고 해명했는데, 홍명보는 해당 시간을 전적으로 훈련 기간이 아닌 개인의 사적 시간이라고 인식했다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의리 축구 대다수의 축구팬들은, 2014년 5월에 최종 엔트리가 발표된 시점부터 브라질 월드컵에서 홍명보호가 엄청나게 몰락할 것이라고 예견 했습니다. 23명의 선수들 중에서 과반수 이상의 14명이 201..

2010년 월드컵 때 정해성 위원장(당시 코치)하고 인연이 있었는데, 연락이 오게 되어 전력강화위원장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합니다.르나르 감독의 경우, 줌미팅 때 언론에 비쳐진 것 만큼의 의욕이 있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시안컵을 봤다고 하는데, 대한민국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등의 질문에 대해서도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만나봐야 한다는 여론이 있어 날짜를 잡았는데, 이틀전에 장소 옮겨달라고 해서 오케이 했는데도, 이후에 또 바꾸자고 하길래 의지가 없다고 판단해 최종 결렬 되었습니다. 각 위원마다 세 명의 후보군 감독을 추천할 수 있었는데, 대부분 한 명 내지는 거의 추천하지 않았습니다. 박주호 위원장 본인은, 아모림 감독, 제시 마쉬 감독, 세아브라 감독 등등을 추천했고, 제시 마쉬도 다른 ..

이임생 기술발전위원장은, 브리핑에서, 일단 울산HD 구단에게 감사하단 말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울산팬들에게는 홍명보 감독 선임에 있어, 사과를 표했고, 5개월동안 전강위를 통해 노력했다고 전했습니다. 일단, 감독을 선임하는 데 있어서, 1순위, 2순위는 외국인 감독 이었고, 그 감독을이 누군지에 대해서는 이름을 밝힐 순 없지만, 대외적으로 어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1순위 감독: 국내체류기간 + 비용 문제로 성사되지 않았음 2순위 감독 : 타 국가 국대감독이었고, 타 국가 협회 개입으로 성사되지 않았음 그외 7~10차까지 회의를 진행하였고, 그러던 와중에 정해성 기술위원장이 돌연 사퇴를 하였습니다. 그 후, 기술이사인 이임생이 진행하게 됩니다. 감독 최종 후보 5명 중에 국내는 홍명..

대한민국 축구선수였던 홍명보는 1990년 북한과의 통일축구대회에 참여하였는데, 이는 분단 이후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이 북한에 방문하여 경기를 가진 최초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북한 원정은 요즘에도 선수들에게 큰 부담이지만, 1990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상, 당시에는 평양 원정을 치르기 전에, 안기부에서 교육을 받아야 했다고 합니다. 물론 북한도 무서웠겠지만, 당시 안기부의 명성 또한 대단하였으니, 홍명보는 안기부에서 교육 받았을때 머리끝이 쭈볏쭈볏 섰다고 회고하며, 안기부 직원은 선수들에게 도청에 유의할 것을 특별히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대표팀의 숙소는 고려호텔로 정해졌는데, 홍명보는 안기부에서 교육에도 불구하고, 도청에 대해 설마 그런일이 있을까 하여 크게 신경은 쓰지 않았지만, 이내 곧 그 직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