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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에밀 카폰 (1916~1951)
 
1916년 미국 캔자스에서 태어난 에밀 카폰 대위는 1940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군 제 8기병연대 소속의 군종신부로서 한국에 온 뒤 부대원들과 북진합니다.
 
카폰 신부는 1950년 8월, 전장에서 부상병들을 구출하는 공로로 동성무공훈장을 수여 받기도 했으며, 그는 자신의 지프 보닛에 간이 제대를 만들고 병사들의 고해성사를 들어주고 미사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카폰 신부와 병사가 미사를 드리는 모습
1950년 11월 원산에서 그의 부대는 중공군에게 포위되었고 후퇴명령이 떨어집니다.
 
하지만 카폰 신부는 후퇴명령을 거부하고 통나무와 지푸라기로 참호를 만들어 부상병들을 대피시키도록 합니다.
 
결국 중공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로 가는 '죽음의 행진에서 조차 그의 희생과 헌신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쓰러지는 동료를 업고 수 km를 가고 포기하려는 병사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포로수용소에 도착하고 나서도 식량창고에서 음식들을 훔쳐 영양실조에 걸린 동료들에게 나눠주고, 부상병들의 빨래를 도맡아 하는등 끊임없는 희생과 헌신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져 1951년 5월, 카폰 신부는 머나먼 이국의 땅에서 35세의 나이에 눈을 감고 맙니다.
 
 
 
 
그의 희생과 헌신, 박애의 정신은 1953년 휴전이후 석방포로들에 의해 알려졌고, 참전용사들과 캔자스주 의원들의 지속적인 청원을 통해 62년이 지난 2013년, 미국정부는 카폰신부에게 미국 최고훈장인 '명예훈장'을 수여합니다.
 
원래 명예훈장은 행위가 이루어진 시점 2년이내에 대통령에게 품신되어 3년내 수여하는게 원칙인데, 그 원칙을 깨고 수여한것입니다.
 
바티칸에서도 카폰 신부의 성인추대를 위해 조사중에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그의 용맹을 기립니다. 그는 총을 들지 않았지만, 그는 가장 강한 무기, 즉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간직했으며 그 사랑을 통해 그는 죽기를 원하고 마침내는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 버락 오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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