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우선 이런 러시아 연해주의 '의병' 들이 독립군이 아니고 그냥 한인계 러시아인들이 구성한 독자적인 군 세력이다라는 주장들이 있는데 이걸 먼저 보고 가야 합니다.
윤상원이란분의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라는 고려대 박사 논문의 내용에
"그들은 대부분 귀화하지 않은 한인, 즉 여호인이었다. 러시아 지역 한인 빨치산 부대의 근간은 연해주 지역의 기층민중들인 비귀화 한인들과 간도와 조선으로부터 건너온 청년들이었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즉, 연해주 한인의 항일부대는 사실상 독립군들이었다는 말이 성립됩니다.
0. 이전의 상황
일단 1910년 경술국치를 기점으로 수많은 이전 독립군들이 중국,만주,연해주로 이동하며 조직적으로 무장 독립운동을 벌였는데, 이들은 연해주를 거점으로 신흥무관학교같은 장교 육성기관을 설치해 간부를 조직적으로 육성했고, 이들을 바탕으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며 1920년 봉오동 전투나 청산리 전투같은 승리들로 미약하지만 꾸준히 성과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독립군은 일본군에 비해 무기의 부족과 화력의 열세로 사실상 게릴라전으로 전투를 해야 했는데, 또 다른 문제로 이 독립군들간의 통합적인 지휘부가 부재한 채로 각자 도생을 하며 독립운동을 하니 통합적인 성과를 이뤄내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일본군이 청산리 전투 이후 간도 토벌을 목적으로 만주의 한인들을 잡아죽이고 초토화시키자 이들은 사실상 러시아 연해주로 반강제로 이동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자유시 참변이라는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1. 협력
기존 연해주 한인들은 주로 1914년 1차대전 발발 전 기준 6만 4천 가량이 연해주에 거주 중이었는데, 이들은 1차대전으로 제정 러시아가 총동원을 내리자 러시아군에 입대해 싸울 정도로 러시아에 꽤나 협조적인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한편 이 상황에서 연해주 한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임시정부까지 수립하였으나, 다른 임시정부들과 의견 합의를 보지 못하여 결국 독자적인 독립 운동 단체로 따로 놀게 됩니다.
이 와중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적백내전이 발발하자 한인들은 주로 볼셰비키 측을 지지하기로 결의를 하게 됩니다.
근데 문제는 1920년 4월 4일에 관동군이 백군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연해주를 침공했는데, 사실 이들의 목적은 연해주 한인들을 토벌하기 위해 러시아가 혼란한 틈을 타 한인 정착지를 타격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이때 수백명의 한인들이 사망하게 되었는데 이를 연해주 4월 참변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한편 관동군이 백군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진입하니 한인들이 볼셰비키를 지지한다는 명분이 더욱 강해졌고, 이들은 붉은군대에 입대하여 백군과 관동군에 맞서 전투를 벌였으나, 적백내전에서 적군이 승리한 후 소련이 수립되지마자 소련 정부에선 이들을 바로 무장해제 시켜 버리기도 합니다.
2. 배신
근데 문제는 어차피 소련 정부 측에서는 적백내전에서 이미 우크라이나 흑,녹군이나 백군계열 카자흐 등등 다양한 소수민족 분리주의군과 전투를 벌인 입장에서 자신들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무장단체를 인정할 수 없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고, 특히 이들때문에 일본이 개입하여 극동에서 전투가 벌어진걸 생각하면 더더욱 힘들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독립군들은 무장해제당하고 임시정부이던 대한국민의회는 사라졌으며, 한인들은 소련 공산당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때 공산당의 통제를 받아 들일 수 없던 계파들이 다시 만주로 이동하게 되었고, 대표적인 인물이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국군 육군 중장이며 한국전쟁의 영웅 김홍일 중장이었습니다.
위 사진에 나오는것 처럼 1927년부터 10년간 소련 정부에선 인디언 보호구역 비슷하게, 소수민족들에게 일부 지방을 자치령처럼 떼주었는데 고려인들을 위한 자치 지역을 연해주의 포시예트라는곳에 차려주었습니다. 국가와 국토가 없던 이들에게 이 구역은 꽤 희망적인 일이었고 이 지역에서 지낸 10년간 고려인들의 인구는 거의 17만에 육박하게 되어 사실상 소련 내의 고려 소비에트 공화국이 설치 직전까지 가는 꽤 좋은 상황이 됩니다.
3. 강제이주
하지만 1931년 9월 18일 일본군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공하자, 소련 공산당 측에서는 이전 적백내전에서 일본군이 한인들을 명분으로 진격해 들어왔으니, 이번에도 이를 명분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고 위에 언급하였듯이 점점 고려인들이 늘어나며 자치권을 요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1937년 8월 21일 이오시프 스탈린은 고려인 강제 이주령을 발표하게 됩니다.
이 작업은 일주일~3일 전 이주를 통보하여 한인 사회가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은 채, 이들을 중앙아시아로 대이주 시켰고 9월부터 이뤄진 이 작업은 11월에 거의 모든 한인을 중앙아시아로 보내 버립니다.
근데 문제는 이동과정에서의 열악함으로 꽤 많은수의 한인들이 기차에서 사망했는데, 1938년에 조사에 따르면 고려인 1000명당 42명이 사망하였고 어린이는 5명중 1명이 사망하는 아주 열악하기 짝이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이 조차도 이동과정에서 죽은것만 기록한 수치고 도착하고 질병이나 다른 이유로 사망한 사람까지 포함하면 더 많을걸로 예상 되고 있습니다.
한편 한인 지도자들 역시 전부 굴라그로 끌려가거나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으며, 일부는 아예 총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합니다.
이 중앙아시아에 고려인들을 던져놓고 소련 정부는 고작 임시 거주용 천막과 얼마 안되는 식량만 준 채로 알아서 자생하게 버려두었으며, 고려인들은 서로 협력해 관개 시설을 새로 만들고 벼 농사를 지으,며 3년만에 기존 삶의 방식을 회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은 다시 기반을 갖추기에 여념이 없던 차에 지리적 문제까지 겹치며, 독립운동을 하기가 매우 어려워지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4. 결론
결론은 독립군사에서 고려인들은 이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고, 독립운동에 꽤 비중을 가지고 있었으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로 인하여 독립운동의 무대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딥한이야기 > 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슬람식 장례식에 관하여 (0) | 2024.02.05 |
---|---|
우리나라와는 너무도 다른 일본의 에스컬레이터식 입시제도 (0) | 2024.02.02 |
우리나라와 일본의 밀 자급률 (0) | 2024.01.30 |
미국에서 펜타닐 같은 마약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 계기 (0) | 2024.01.29 |
성경에 '없음' 구절이 있는 이유 (0) | 2024.01.29 |